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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의 성립과 발전 - 이길상

한주랑 2012. 3. 1. 10:25

 

20. 삼국의 성립과 발전 - 이길상

 

다. 신라의 쇠망(衰亡)과 후 삼국의 성립

(1) 난세의 영웅들

당의 힘을 빌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그 당이 망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쇠망도 별 수 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공식은 아니지만 역사는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황소의 난(875~884)으로 당이 어지러울 때, 그 여파가 신라에 미쳐 진성여왕의 치세기간(887~897) 신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접어 들게 된다.

이것을 두고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진성여왕의 실정이라고 말하고, 연약한 한 여성 군주에게 모든 잘못을 떠 넘기고, 여러 가지 그 증거를 제시하여 그 당위성을 찾기 한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 세종대왕과 같은 훌륭한 군주가 있었더라도 그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역사의 흐름이라고 한다.

관리들도 살길을 찾아 방황하고, 치안은 엉망이며, 누구하나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도둑이 따로 없고 모두가 도둑이 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서로가 도둑이 되는 세상을 사람들은 난세(亂世)라고 한다. 이러한 난세를 당하면 이를 극복하는 영웅이 나타나는데 대개는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나, 힘을 얻어 지위가 굳어지면 그 출생을 미화(美化)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후 삼국시대의 혼란기라고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등장하는 영웅은 수 없이 많으나 역사에 기록되어 이름을 남기고 있는 세 사람,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그리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으로 요약해서 이야기를 풀어 보자.

이들에 관한 전승된 이야기는 많지만 실제로 기록으로 남긴 것은 극히 소략하고, 그 진위를 가리는데는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가감없이 요약해서 여기에 소개코자 하니 그 판단은 독자들께서 스스로 해 주시길 바란다.

(2)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918)

삼국사기 열전 10 궁예... 궁예(弓裔)는 신라사람으로 성은 김씨고 부친은 제 47대 헌안왕 의정이고, 모친은 헌안왕의 빈어(賓御)이나 그 성명을 알지 못한다. 또 혹은 제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5월5일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때 지붕 위에 깨끗한 빛이 있어 긴 무지개와도 같이 하늘로 맞닿았다.

이 때 일관이 왕에게 고하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5,5)에 나고 나면서부터 이가 낫고 또한 이상한 빛이 나타났으므로 장래 국가에 불리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이를 기르지 않는 것이 옳을 가 하나이다 라고 하자 왕은 이 말을 믿고 곧 중사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이를 죽여버리게 하였다.

사자는 이이를 강보 속에서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져버렸는데 그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얼른 받아들었으나 잘못하여 손 가락이 그 눈에 들어가서 한 쪽 눈이 애꾸눈이 되었다.

이 때 유모는 곧 궁예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온갖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를 양육하였으나, 나이 10여세가 되도록 장난이 심하고 이를 고치지 않음으로 유모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자마자 나라에서 버림을 당하여, 내가 온갖 어려움을 참고 남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는 그를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이 미친 듯 장난이 심하니 반드시 사람들이 아는 바되면 당장 나와 너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꾸짓자 이에 궁예는 울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러하오면 제가 어디론지 떠남으로서 어머니에게 화를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떠나 갔다.

궁예는 드디어 세달사(世達寺 지금 흥교사가 그 절이다)에 들어가 머리를 갂고 중이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그는 불법의 승률(僧律)에 구애 받지 않고, 담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일찍 재를 올리기 위해 가는데 까마귀들이 무슨 물건을 물어다 그의 바릿대에 떨어뜨리므로 이를 펴 본적 왕(王)이라는 글자의 참서(讖書)가 있음으로 곧 이를 감추어 말하지 않고 속으로 왕이 될 것을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신라는 날로 쇠약하여 져서.......중략...진성여왕 즉위 5년(891) 죽주의 도둑괴수 기훤에게 몸을 맡겼는데 기훤은 오만하여 그를 예로서 대하지 않음으로.....몰래 기훤의 부하인 원회, 중훤 등과 결탁하여, 진성여왕 6년(692) 북원의 도둑 양길에게 몸을 던졌다.

양길은 선종을 잘 대우하여 모든 정사를 위임하고, 드디어는 군사를 나누어 주어 동쪽 지방을 경락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악산 석남사에서 자고 그 다음날 드디어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을 습격하니 모두 이에 항복하였다.

진성여왕 8년(894) 궁예는 명주로 침입하였는데, 그 무리 3천 5백명을 14대로 나누어 김대금, 모근, 장귀평, 장일을 사상으로 하여 군사들과 즐거움, 괴로움을 같이하여 탈취함에는 공을 위하고 사를 버림으로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뒤이어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저족(인제) 생천(양구) 부약(춘천) 금성(지금 금성) 철원성(철원) 등을 격파하니 군세가 심히 강성하고 패서(浿西)의 적구들로서 대항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궁예는 개국하여 임금이라 칭하고 내외관직을 설정하였다. 이 때 우리 태조(왕건)는 송악군으로부터 궁예에게 내부하여 마침내 철원태수의 벼슬을 받았는데, 진성여왕 9년(896)에는 승령 임강의 두 현을 공취하고 신라 효공왕 원년(897)에는 인물현(희양)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궁예는 송악군을 한북의 명군으로서 산수가 특히 뛰어난다 하여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공암(양주) 금포(김포) 혈구성(강화) 등을 격파하였다. 이 때 양길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충주)등 30 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궁예가 그 영지를 넓히고 인구가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그런데 양길이 30여성의 경병으로 이를 습격하였으나, 궁예는 이를 미리 알고 먼저 군사를 일으켜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효공왕 3년(899) 2월에 궁예는 송악성을 수리하고 우리 태조(왕건)를 정기군감으로 삼아 양주, 견주(양주)를 정벌하고, 그 해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하였고, 효공왕 4년(900)에 또 우리 태조에게 명령하여 광주(지금 廣州), 충주, 당성(남양), 청천(온양), 괴양(괴산) 등을 모두 평정하였는데 이 공로로 태조(왕건)에게 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효공왕 5년(901)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에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음으로 옛날의 평양 구도는 사냥터가 되어 초목이 우거지게 되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그가 날 때부터 왕실로부터 버림받은 원한이 있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말을 하였다.

궁예는 일찍 남으로 순행(巡幸)하여 흥주(풍기)의 부석사에 이르렀을 때, 신라 왕의 벽화가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쳐 없앴는데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

효공왕 8년(904)에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이에 비로소 광평성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는데... 중략.... 그해 7월에 청주 사람 1천호를 옮기고 철원성으로 들어가 서울을 정하고, 상주등 30여 성을 공취하니 공주장군 홍기가 그 무리를 이끌고 내항하였다.

효공왕 9년(905)에 궁예는 송악으로부터 철원에 들어가서 관궐누대를 수리하고 사치를 다하고 연호를 무태로 고쳤다가 다시 성책 원년으로 하고, 패서를 13 영으로 분정하였는데, 평양장군 금용이 투항하고, 증성(안변)의 적의황의적명귀 등이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신라를 병합할 뜻을 가지고, 국인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로부터 내부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효공왕 15년(911) 연호를 수덕만세,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태조(왕건)를 금성에 파견하여 정벌하고 이를 나주(羅州)라 하고, 그 공으로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이 때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 금적을 쓰고, 몸에는 방포를 입고, 장자를 청광보살, 계자를 신광보살이라 하여,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며, 동남동녀로 하여금 큰 꽃 모양으로 만든 일솔을 받들어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승 200 여명에게 명령하여 범패염불을 하면서 그 뒤를 따르게 하였고, 스스로 경서 20 여권을 지어 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경사가 아니나, 정좌하여 이를 강론 함으로 중 석총은 말하기를 "이는 모두 사설괴담으로 가히 가르칠 것이 아니다"라고하니 궁예가 노하여 철퇴로서 때려 죽였다.

신덕왕 2년(913)에 궁예는 태조(왕건)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고, 다음해에 연호를 정개로 개원하고 태조를 (다시)백강장군으로 삼았다. 신덕왕 4년(915) 궁예의 부인 강(康)씨는 왕의 모든 정사에 비법이 많음으로 정색하여 이를 간하니 궁예는 이를 싫어하며 말하기를 "너는 다른 사람과 어찌 간음하였느냐?"라고 하므로 이에 강씨가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하니 궁예가 말하기를 "내 신통력으로 이를 보는 것이다"하고 쇠 방망이를 달구어 그 음부를 찔러 죽이고 그에게서 난 두 아들까지 죽여 버렸다.

그 뒤부터 궁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성을 급히 내어 위로는 모든 관료 장군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빈번히 있었고, 부양과 철원 사람들은 그 혹독한 폭정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이 보다 먼저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당나라로부터 와서 철원시전에 살았는데, 신라 경명왕 2년(918) 백발의 노인이 낡은 의관을 하고 왼손에는 바리때(자완)를, 오른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왕창근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 거울 사겠는가?"하므로 왕창근은 곧 이것을 쌀과 바꾸어 이를 샀는데, 그 노인은 이 쌀을 거리에서 얻어먹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왕창근은 거울을 벽에 걸어놓고 햇볕이 거울을 비치니,... 옛 시와 같은 글자가 나타나고...그 내용을 살핀 즉 "상제가 진마(진한과 마한)에 내리시니, 먼저는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으리라" "사년 사이에 두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몸을 푸른 나무 속에 감추고, 하나는 검은 금 동쪽에 나타냈도다"하였다.... 왕창근은 이를 궁예에게 알리니...궁예의 포악무도함이 날로 심하고, 관료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918) 6월에 장군 홍술(홍유), 백왕(배현경), 삼용산(신숭겸), 복초기(복지겸) 등 4명이 비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지금 주상은...중략...드디어 태조는 결심하고 문을 나섰다. 이에 제장들은 앞에서 부르짓기를 "왕공(왕건)이 의기(義旗)를 들었다"하니 이 때 앞 뒤로부터 따라서는 사람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먼저 궁성에 이르러서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태조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1만 여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궁예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변복하고, 궁중을 빠져 나와 산림 속으로 도망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부양(평강)의 백성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궁예는 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일어나서 경명왕 2년(918)에 이르기 까지 무릇 28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다가 멸망되었다.

(3) 후백제 견훤(甄萱/?~936)

삼국사기 열전 10 견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로 하였다. 그 부친 아자개는 농사로서 생활하다가 뒤에 가세를 이르켜 장군이 되었다. ...중략...진성여왕 6년(892).....견훤은 몰래 딴 마음을 품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가지고 서남주,현의 적도들을 토벌하려 떠났는데, 그가 이르는 곳 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한 달 사이에 5천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에 그는 무진주(광주)를 습취한 뒤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도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고 칭하지 않고, 진성여왕으로부터 "신라서남면 도통지휘병마제치 특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겸 어사중승 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는 벼슬과 식읍 2천호를 받고 있었다.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 뒤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 우위(優位)를 유지했다.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여 친려(親麗)정책을 쓰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한 후,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세워놓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古昌: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했으나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왕건이 신검 등을 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이겨 앓다가 얼마 뒤 황산(黃山:충남 논산군 연산면)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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