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 |
-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믿음이 곧 모든 행위와 사고의 근거가 된다
2011년 봄,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에는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복음주의 교계의 ‘록스타(Rock Star)’라고 이름 지은 랍 벨 목사의 ‘사랑이 이긴다’라는 저서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랍 벨은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들을 할 여지가 있는 질문들을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책이 나오자 복음주의 교계의 또 다른 스타 목사인 존 파이퍼가 자신의 트위터에 “잘 가시오. 랍 벨!”이라는 말로 결별을 선언했다. 민감한 반응이다! 곧바로 랍 벨의 책을 반박하는 책들도 연이어 나왔다. 제목부터 ‘사랑이 이긴다’를 겨냥해 지은 ‘하나님이 이긴다’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우리는 단순히 사랑이 이긴다거나 정의 역시 이긴다고 믿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는다. 그 누구는 완벽하여 자비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이시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하느님(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 4:8)라는 가르침에 비춰볼 때 ‘사랑이 이긴다’와 ‘하나님이 이긴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싶을 것이다. 신학적으로도 정의와 사랑이 상호보완적인 데다 정의가 사랑의 출발이고 사랑이 정의의 완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큰 문제가 아닐 성도 싶다. 하지만 목회를 인도하는 교회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천국에서의 복락과 지옥에서의 형벌이 일반 신도가 교회에 나가는 매우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같은 심판이 없다고 한다면 신도들의 열정과 숫자가 대폭 줄 것이다. 신도들에게 예민한 문제에 교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랍 벨 목사의 ‘사랑이 이긴다’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머물던 2011년 6월 15일에 미국 남침례교 연차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 인문주의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이미 밝혔듯이, 교리란 본디 외부 및 내부의 위협과 도전에 대한 방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도전과 위협의 성격과 강도에 따라 대응의 성격과 강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말은 교리란 불변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시대적 상황에 따라 때로는 ‘과격하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성서에 예수가 가톨릭 교인이 아닌 아브라함이 부활하여(누가복음 20:37~38) 천국에 있다는 것(누가복음 16:19~31)을 ‘직접 그리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가톨릭교회가 1215년 개최한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포할 때에 상황이 바로 그랬다. 이슬람과 교회의 사활을 걸고 살육을 벌이던 십자군전쟁 시기(11세기 말~13세기 말)에 가톨릭교회로서는 설사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가톨릭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것이 이후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800년 가까이 고착되어 내려왔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 때문에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질문들에 차례로 답해온 이 글은 처음부터 종파 및 교파적 교리와 그에 따른 숱한 논란들과는 아예 무관한 입장을 취해왔다. 차제에 밝히자면, 이 글이 시종 취하고자 하는 입장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어떤 ‘종교적(종파적 내지 교파적) 관점’이 아니다! 그리하는 까닭은 이 회장의 질문들에 대해 종교적 관점에서 답한 글들이 아는 한에서만 이미 서너 개가 있는 데다, 인문학적 글쓰기가 가진 장점 때문이다. 어느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입장과 언어를 통해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자폐적이어서 그 구성원들에게는 ‘무척’ 은혜롭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거북스럽기 십상이다. 하지만 비록 종교적 주장들이라 해도 그에 대한 인문학적 설명은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띠기 때문에 설득적이며, ‘덜 은혜롭긴 해도 덜 거북스럽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다.
단테의 뒤를 이은 에라스무스, 마키아벨리, 토마스 모어, 파스칼, 기욤 부테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이 확립하여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 내려온 ‘인문주의적 글쓰기’에는 일반적 양식이 있다.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여, 개념을 정리하고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들을 끌어다 활용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나는 이 회장의 이번 질문도 되도록 이 방법을 따라 답하고자 한다. 때문에 만일 당신이 천국의 복락과 지옥의 형벌에 대한 종파적 또는 교파적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서 눈을 떼고 다른 일을 하기 바란다.
† 천국이란 무엇인가 고대인들은 대부분 사후에 또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믿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세기경에 출현한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 내세관은 유대교에서 유래했다. 사두개인들처럼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대인은 죽어서 의인은 ‘하늘(샤마임)’로 가서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성취하고, 악인은 ‘음부(스올)’로 가서 죽음이라는 영원한 결핍 속에 있게 된다고 믿었다. ‘시편’ 49편에는 이 같은 생각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도다.(셀라) 그들은 양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릴 것이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그러나 하느님(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셀라)”
초기 기독교의 내세관를 처음 제시한 이는 당연히 예수다. 그리고 이 내세관을 발전시킨 사람이 사도 바울과 요한이다. 이들은 유대교의 내세관을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유대인들처럼 천국을 멸망한 유대 국가의 재건으로 알거나 의로운 사람에 대한 보상으로 보지 않았다. 또 ‘하늘’에서 죽은 자를 받아들이는 이도 그들의 ‘혈연적 조상’이 아니라 ‘신’ 또는 ‘부활한 신앙인들’이다. 요컨대 신약성서에 나타난 천국은 이 땅에서 뭔가 부족했던 세속적 결핍을 채우는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신과 부활한 신앙인들과 함께 신성을 체험하는 곳이다. 천사의 인도를 받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누가복음 16:22) 그들은 천사처럼 다시 죽는 일이 없으며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누가복음 20:35~36) 바울이 설파했듯이 부활한 자들은 ‘신령한’ 육체를 새로 부여받았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5:44)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같은 가르침들이 주는 종교적 흥분과 열광에 사로잡혀 세상의 부귀영화를 부인하고 자신들의 소망을 신과 함께할 내세에 두게 되었다.
천국에서의 삶을 ‘혈연적 가족들과의 삶’으로 보는 유대교와 달리 ‘신앙적 가족들과의 삶’으로 파악한 예수의 혁신적 내세관은 그가 설파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누가복음 16:19~31)에 잘 나타나 있다. 옛날에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베푸는 부자가 있었다. 그 집 문 앞에는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가 살았다. 나중에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부자도 죽어 불과 고통이 있는 음부에 떨어졌다. 부자가 눈을 들어 올려다 보니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불구덩이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거절한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세상에서 부귀를 누린 악인은 음부로 가고, 가난한 선인은 천국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생전의 혈연적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적 가족들과 만나 함께 산다는 것이다.
† 신중심적 천국관 vc 인간중심적 천국관
물론 기독교 안에는 예수가 가르친 이 같은 ‘신중심주의적 천국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른바 ‘인간중심적 천국관’이 있다. 일찍이 2세기에 활동한 교부 이레내우스는 예수가 가르친 천국의 전 단계로 신이 창조한 선한 세상에서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고 영원한 삶을 즐기는 천년왕국을 설파했고, 아우구스티누스도 말년에는 천국에서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남녀가 신령한 육체들을 보고 즐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조반니 디 파올로 작 ‘창조와 낙원 추방’
중세에 널리 읽혔던 신학서적인 ‘해설’에도 천국의 이미지가 왕궁으로 묘사되는 등 ‘인간중심적 천국관’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은 ‘낙원(파라데이소스)’을 ‘하늘(우라노스)’과 분리시켜 세속화하였다. ‘신의 거처’인 ‘하늘’은 인류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영원하며 천사들은 있지만 인간은 없는 철저한 신중심적 장소다. 하지만 ‘낙원’은 목가적 환경에서 성도들이 가족과 함께 살며 남성과 여성이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성생활을 하기도 하는 장소다.
존 밀턴(1608~1674)의 ‘실낙원’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기 전에 살던 에덴동산이 그 예다. 하와는 에덴에 도착하자 곧바로 아름다운 꽃들과 달콤한 박하향이 나는 열매들로 신혼의 침대를 준비했다. “아담도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하와도 부부간의 사랑의 신비스러운 의식”을 반겼다. 밀턴이 묘사한 낙원 정경은 이후 스웨덴의 신비주의자 스베덴보리,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거쳐, 독일의 노발리스·괴테, 영국의 바이런, 미국의 에머슨 등에 이르는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에까지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자 19세기에는 인간중심적 천국관이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시인, 소설가, 대중예술가들뿐 아니라 성직자, 신학자들까지 천국을 성도들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 복락을 누리는 사회적 공동체로 묘사했다.
이처럼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세속적 천국관들이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가 지적했듯이,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근대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천국에서의 복락과 지옥에서의 형벌이 일반 신도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어서,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교리논쟁이나 이단논쟁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일관된 내세관이 기독교 안에 정립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반 신도들의 관심 대상도 아니고, 성서에도 나오지 않는 용어인 ‘삼위일체론’이 수백 년 동안 논쟁거리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매우 특이한 일이기도 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20세기 중반부터는 천국 신앙을 거부하는 신학, 이른바 ‘내세를 기약하지 않는 신학’들이 대두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가 내세에 대해 거의 밝히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내세에 대해 아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천국을 환상(근본주의 입장) 또는 상징이나 신화(자유주의 입장)로 표현할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입장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거두인 칼 바르트도 사후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거부하고, 우리는 오로지 과거에 대해 그리고 세속적인 존재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20세기 신학의 또 다른 거물인 폴 틸리히도 불멸하는 것은 자의식을 가진 개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영’ 또는 ‘존재의 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내세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묻자. 이제 ‘천국 신앙’은 끝났는가? 과연 그런가? 아니다! 랍 벨 목사의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이 삽시에 일으킨 돌풍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천국의 복락과 지옥의 형벌에 대한 신앙은 아직도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이슈이며, 앞으로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내세에서의 삶을 계속해서 믿을 것이다. 그런데 이 회장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물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 가령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은 백만장자다”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그것을 믿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 말에 당신의 ‘감정’은 동요하겠지만, 곧바로 당신의 통장에 남아 있는 잔고를 기억하고 그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당신에게 거액의 수표를 건네주면서 자기는 억만장자인 당신의 삼촌이 남긴 유산을 집행하러온 변호사임을 밝힌다면, 그때는 당신도 그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이것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신경과학자 앤드루 뉴버그와 마크 로버트 윌드먼이 저술한 ‘믿는다는 것의 과학’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감정·인지·지각·사회적 합의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죽은 후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20세기가 낳은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그의 마지막 유고인 ‘확실성에 대하여’에서 믿음을 ‘근거가 제시된 믿음’과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믿음’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근거가 제시된 믿음들의 바탕에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믿음이 놓여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쉽게 이해하려면 수학에서 ‘공리’와 ‘정리’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공리란 기하학에서 평행선 공리가 그런 것처럼 우리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정리들, 곧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근거가 제시된 믿음’들의 확실한 증거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한 증거란 우리가 무조건 확실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의심 없이 행동한다” “우리는 이 ‘받아들임’이 행위의 근거를 형성하고, 따라서 사고의 근거도 역시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연이어 주장했다. 요컨대 믿음이란 우리가 아무 근거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고의 근거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으로 비추어 보면, 천국의 복락에 대한 믿음은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믿음’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다른 숱한 기독교적 행위와 사고의 근거가 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만일 당신이 예수가 가르친 천국의 복락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당신이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믿는다는 것의 과학’의 저자들도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숱한 뇌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종교적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의 뇌는 실로 ‘믿는 기계’이고, 우리의 체험은 그런 믿음들의 깊이와 질에 영향을 준다. 이 믿음이 진리의 한 조각만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를 언제나 우리의 이상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그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를 살아갈 수조차 없다. 그 믿음들은 우리의 신념이고, 우리에게 신앙을 주고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말했다. 하지만 뇌과학의 렌즈로 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Credo ergo sum)’.” 어떤가? 믿음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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