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저
“토저와 함께 드리는 기도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그의 연구실에 초대되어 그와 함께 기도했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그는 최근 묵상했던 말씀들을 나눈 후에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연구실 중앙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기댈 만한 의자나 책상도 없이 우리는 서로 마주하고 반 시간 동안 기도를 드렸다.” - 로버트 워커
토저의 기도는 그의 설교와 똑같이 정직함, 솔직함, 유머, 강렬함을 담고 있었고 그의 기도는 그의 설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발견한 것들을 선포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의 기도는 또한 그의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주 “기도는 그 사람을 결정짓는다”고 말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그의 기도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매일 여러 시간을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데 쏟았던 토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자주 경험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가족과 친구들을 피해 하나님과만 시간을 보냈다.
맥아피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그리고 토요일에 토저의 연구실에 들러 반 시간식 기도했다. 그는 어느 특별한 날을 기억한다. “토저는 자기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안경을 벗어 의자 위에 얹어 놓았다. 구부린 발목을 대고 앉아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을 채 고개를 들어 기도를 시작했다. ‘오 하나님, 저희가 주님의 존전에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강렬함 임재가 그 방안에 가득했다. 우리는 둘 다 침묵의 황홀경과 경이 가운데 경배를 드렸다. 나는 그 날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 A. W. 토저/ 제임스 L. 스나이더
하나님이 평생 쓰신 사람 (제임스 스나이더 작)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하나님 나라를 계획하시고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해
아벨로부터 -셋-노아 -아브라함 -다윗 그의 후손들이 메시아가 오시는 통로로
사용 되었듯 그 시대에 맞는 사람을 택하시어 사용하셨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다년간 A.W.토저(1897-1963) 책을 펴낸 편집자인 제임스 스나이더의
토저에 대한 살아 있는 글이다
토저는 하나님을 알기에 늘 굶주림으로 갈급해하며 한 평생을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은 만남 속에서 말씀을 묵상,
연구하여 양들의 먹이를 철저히 준비하는 목회자로,
교단지 편집자로 독서와 저술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다
토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청중을 복음적인 설교로
매료 시키는 강한 파워가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남이 안 읽는 고전 양서로 해서 신학, 철학, 문학, 시...등
많은 독서를 통해 독창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어떻게 하면
차별성 있는 설교를 해서 청중과 동화되어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할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다한 사람이다
정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고 무섭도록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
목회를 위해 가족보다 친구보다 하나님 만나는 일에 몰두한 사람
서재에서 늘 책과 함께하면서 기도 전용바지를 입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로 연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을 닮아 가는 일에 시간을 보낸 사람
목회를 크게 성공해 명성이 높아도 언제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청빈의 삶으로 젊은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던 사람
“예배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봉사는 무익하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다“
설교의 힘이 강력하고 예리하고 신랄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회심의 역사가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토저의 목회 비전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 했다
이 책을 보면서 토저의 삶이 오아시스에 필요한 물을 잔뜩 먹은 스폰지라는 생각을 했다
수원지(水源地)인 성령으로부터 스폰지에 물을 품어 목마른 자들에게 짜 주고
또 물을 품어 갈증을 해소해 주기위해 기도로, 묵상으로,
독서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 연습으로 물을 준비하는 사람
토저의 삶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께 그토록 철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쓰임 받았다기보다 하나님이 쓰실 수가 있을까?
그것은 준비되었기에 쓰셨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더 지혜롭다 했다
독서를 통해 직접 겪지 않은 것이 나의 경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정신과,
생각, 특성을 본받고 배우게 되어 큰 힘이 되었다 한다
그 과중한 업무(목회, 책 저술, 편집, 부흥강사)에도 기도와 성경 묵상,
독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노력파다
무엇이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살아 움직인다
물질과 지식만능, 최첨단의 정보화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들이 들끓는 이 시대에 토저 같은 인물이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닌가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은 물론, 신앙인에게도 진리가 왜곡되어 순수한
청교도적 복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포스트모던니즘으로
우리 영혼을 혼탁케 하는 일들이 교회에서도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안타까움에 요즘 영분별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책이 목양하시는 목사님들에게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했고
목회하시는 것이 이렇게 피눈물 나는 애로가 있구나하는
목사님들의 고심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기회도 됐으며
나에게 도전되는 부분도 상당하여 많은 유익이 되었다
무엇보다 기도와 하나님을 아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내 의지까지 이를 수 있어서 삶에 적용하여 지,정,의를 고루 갖춘
신앙인으로 바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08. 3. 12.
예배인가? 쇼인가? (A.W.토저) -1부
이 글은 A.W. 토저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발췌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예배 행위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적극적인 행위가 최고의 예배이다.
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니케아 신경은 우리가 '한 하나님, 즉 천지를 지으신 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시45:11)
전폭적인 하나님 경배
예배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 아닌 것을 예배로 착각하는 사람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여 그들을 착각에서 구출해주어야 한다.
마술적 힘에 대한 유혹
신앙에서 마술적 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한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한 후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기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까지 우리는 쉬어서는 안 된다.
나의 생각까지 하나님의 성소가 되도록 당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소가 되도록 하라.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모든 시간과 장소를 하나님께 넘겨드려라.
그러면 당신은 그분을 올바르게 예배할 것이고, 그분은 그 예배를 받으실 것이다.
2장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인간의 존재 이유
하나님의 창조의 첫째 목적은 도덕적 존재를 영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준비시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서 하신 모든 것,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신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이다.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전혀 없어야
비로소 나의 예배가 그분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을 참되고 거룩하게 드리려는 결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다!
참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찾아오셔서 예배의 영을 허락하셔야 우리가 참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보다 예배가 먼저이다.
하나님은 일꾼을 갖기보다 예배자를 갖기 원하신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모순이다.
이렇게 예배하라.
우리가 월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토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마음속의 제단
영적 세계의 제단과 현실 속에서의 예배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려면
바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제단을 세워야 한다.
지식, 경이, 사랑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없이는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배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경험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배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교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성숙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이 영혼을 구원할지는 몰라도, 성숙한 예배자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갈망과 하나님의 갈망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하나님도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 갈망이란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영원히 결단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갈망이다.
[2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라
3장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참예배가 아닌 예배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참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가인에게서 배우는 교훈 구약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가인의 예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첫째,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둘째, 가인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셋째,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공허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
참예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예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준엄한 메시지
성령님은 오직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4장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적인 집중력
영적인 집중력을 기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나는 우선 한 달만이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해볼 것을 강력히 권한다.
대가를 지불하는 영성
성공하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 영혼의 눈이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눈길이 우리의 눈길과 마주칠 때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 육신의 눈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우리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 들려온다.
그 음성은 우리의 대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바쁘거나 너무 완고하여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듣는 자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5장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하라
하나님 임재의 중요성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서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배의 시작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
만일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근거는 없다.
그들이 그토록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일했고,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성막이 가르쳐주는 영적 진리
구약에 나오는 성막은 죄악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잘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집중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맛보고, 내적으로 느끼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임재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지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
현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위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위로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지위에 안주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 개인적인 체험의 부재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의 부족
대체로 경건한 두려움, 경외심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배요 사랑이며 경외이기 때문이다.
6장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분은 이기적이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변덕스럽지 않으신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그분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즉시 알아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돌들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보다 '예배하는 사람'을 먼저 찾으신다.
거룩하고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능력은 있으나 도덕적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일꾼으로 사용하실 만큼 '일꾼 기근'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돌들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며,
수많은 천사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일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다른 모든 것들로 이끌었으되, 우리를 예배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해
우리는 중생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7장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부흥은 자정을 넘어서 찾아온다
다른 것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영적인 것만 추구할 만큼 영적 갈망이 크지만 때때로 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자신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거나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는 늦도록 계속 기도한다.
그의 간절함은 그를 한밤중에도 교회로 오게 만든다.
부흥은 자정이 넘어서 찾아온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8장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예배와 경외심
경외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가식적인 음성으로 말한다고 해서 경외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배의 신비적 요소
각 사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활동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제3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예배보다 낭만에 빠진 사람들
복음주의적인 교회 어디서나 음란한 이 시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곡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더 지배적이다.
그리스도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것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분에게 순종하거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최대한 그분의 면전에서 멀리 도망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는 사람들
하늘나라를 소유한 복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고
마음속 소유욕을 근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이처럼 복되게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아니다.
그 방법은 '싸움'이 아니라 '포기'였다.
모든 소유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하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복의 필요성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복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세상적이며, 낮은 도덕적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영적으로 냉랭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모하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감탄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숭모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구별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을 그다지 어렵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경이감에 사로잡힌 채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하듯이 의무적으로 경의를 표할 수는 있겠으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분을 예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교회 예배
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현재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숭모를 지겨워한다면 죽음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타는 신자가 되라
신자들을 불타는 떨기나무가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들은 우리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불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
하나님을 만나는 위대한 체험을 통해 정화된 사람들이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9장 참된 예배의 부흥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하라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본래 한 인격체는 다른 인격체들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격체 서로간의 온전한 '앎'(인식)이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방의 가능성을 전부 알려면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알기 위해 보내는 시간을 결코 낭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다.
더 많은 교육, 더 잘 짜여진 조직, 더 세련된 장비, 더 발전된 방법,
이런 것들로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시선이 그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바뀌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흔히 뒤따르는 현상은 예배의 열기가 고조된다는 것이다.
예배를 사모하는 복된 현상은 영적으로 새롭게 될 때 일어난다.
10장 나를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송가 작가와 함께 드리는 예배
찬송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이 계시된 진리,
또는 성취된 사실을 보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찬송가는 그분의 음성에 대한 음악적 반향이다.
찬송가 작가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높으심과 크심과 거룩하심에
경이감을 느낄 증도 그분에 대해 감탄했기 때문에 그것을 찬송으로 표현했다.
이런 찬송가는 부르거나 그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은사를 부여받은 위대한 신앙인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에 동참하는 일이다.
찬송의 타락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집회에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데는
과거에는, 성경책과 찬송가책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교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소도구와 장치가 동원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는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찬양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누군가가 지적했다.
찬송가는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했던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잘못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교리는 찬송에 영향을 끼친다
찬송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것을 찬송 중에 깨닫는다.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의 선생들은 우리가 처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 다음으로는 할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나타나시기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
예배인가? 쇼인가? (A.W.토저) -3부
이 글은 A.W. 토저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발췌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3부] 사이비 예배를 중단하라
11장 쇼비지니스 연예오락이 예배를 타락시키고 있다
연예오락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실패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의 훈련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깊이 없는 사랑,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과 같은 친교 활동, 세상적 판촉 활동의 도입,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결국 이런 비극적 결과들을 낳고 말았다.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와 교회는 질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양적 팽창을 추구하고, 정상적인 성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과장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연예오락과 흥밋거리에 따라서 운영되는 교회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참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주일마다 사이비 기독교의 자극으로 짜릿함을 느껴보려는 '세례받은 속물 집단'은
참신자들의 무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해도 그들은 참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종교적 쇼를 중단하라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들은 경축의 종을 울리는 일을 좋아하고 마치 게임 쇼의 진행자처럼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나이트클럽에 마음 놓고 갈 수 없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활용하는 것뿐이다.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참기쁨이 없는 곳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그 많은 카우벨(무용 음악에 쓰이는 타악기)와
연주용 톱과 쇼와 영화와 흥미로운 도구들을 사용하고,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해주고, 분위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추어리즘을 경계하라
아마추어들은 훈련받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았으며
영적이지 않은 야심에 찬 수다쟁이가 신앙의 길로 돌아선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이다.
참예배자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예배를 드리려는 자는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가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삶의 어떤 것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연예오락이 아니다
거룩함 가운데 주 예수님께 예배하는 것은 방해할 수도 있는,
추하고 보기 흉하고 불경스러운 것들이 우리 마음에서 제거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교회 안의 연예오락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 위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결국 그들의 견해도 십자가 아래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얄팍하고 세상적인 지도자들은 심지어 성소 내에서조차 연예오락을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십자가를 왜곡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영적인 재앙을 불러들이는 일이며,
어린양이 사자처럼 분노하시도록 만드는 일이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공연자들이 공연하고 관객이 돈을 지불하는 종교 극장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온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교회 안의 이단
종교적 연예오락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너무나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전 세계 수백만의 복음주의자들은 종교적 연예오락에 몰두해 있다.
세상 프로그램들
세상의 프로그램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게 바쳐지고 있으며
신앙적 가치는 도처에서 홀대받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어린애 같은 입술에 음식을 떠먹여주시기 원한다.
이런 사람은 성경이 우리에게 온전함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죄악된 쾌락들
미국의 기독교 소설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성(性)을 이용한다.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만일 낭만과 기독교를 결합시켜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면 순수 기독교 소설을 읽지 않을 보통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고 복음에 접하게 될 것이라는 얄팍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육욕적 충동과 성령님의 깊고 감미로운 감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애, 즉 에로스가 영광의 주님을 섬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죄가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준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는
우리의 올바른 감정이 질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비성경적인 수단들
교회에서도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도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러다보니 성령님의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식되거나 사용되지 못한다.
우리의 교회는 성령님이 비추어주시는 빛으로 밝혀져야 한다.
최근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얄팍한 비성경적 수법들은 성령님을 슬프게 만든다.
우리는 빛을 약화시켰고, 성전 진설병의 떡을 말라버리게 했다.
분향단에서는 향기가 사라졌다.
많은 교회가 예배드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예배가 밀려난 자리에는 '프로그램'이라는 이상하고 낯선 것이 들어와 있다.
본래 무대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프로그램'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지혜로 예배에 적용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이제는 아예 예배로 통하고 있다.
12장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인기를 숭배하는 작태를 그쳐라
선전을 조심하라
마귀는 점점 우리를 세뇌하고 조종하며 교회에 그의 생각을 은근히 주입시키느라 바쁘다.
교회는 지금 세뇌당하고 선전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는 그들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을 지금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그것이 국가의 법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고 애쓰지 말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기독교는 입으로는 신약의 말씀을 늘 되풀이하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적 가치관에 동조하고, 행위로는 세상의 방법들을 열심히 따른다.
그리스도는 단지 '저 위에 계신 마음씩 좋은 분' 정도로 제시된다.
인기가 숭배의 대상이 된 사회
오늘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점을 얘기하고, 좋게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인기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 사업상 거래처 사람들, 직장 동료들, 친목회 친구들의 호감을 잃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들은 친구들을 잃지 않으려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배신하다.
프로그램의 독재
교회에서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을 때,
교회는 너무나 진부한 곳으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판에 박은 것'이 독재적 지배력을 갖게 되고,
우리는 다음 주일에, 아니 다음 달에, 내년에 일어날 일까지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으로 우리 자신을 무감각, 무감동으로 철저히 길들어버렸다.
13장 껍데기 예배는 가라
너무 편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신자들이 거의 없는 이유는
이 땅을 너무 편하게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그다지 떠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며 금과 은을 쌓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천국의 길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상의 방법들에 따라서 그것들을 누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외형을 좇는 사람들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들을 증거로 내세우는 방법이 인간의 지혜를 만족시켜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방법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내실이 있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언제나 얄팍한 껍데기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 문제의 본질은 예배가 형식주의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이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메마른 예배
소위 복음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최근 여러 가지 종교적 소도구나 음향이나 영상 기기들에 대해 필요 이상의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개신교 조상들은 이런 소도구나 기기들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님의 활동의 여지를 좀 더 많이 마련해드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회중이 그리스도의 임재는 더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이런 것들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
물고기가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쳐 가야 별 어려움을 못 느끼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류에 맞춰 흘러가는 당신에게 사람들은 당신이 아주 경건하다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며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당신은 시류에 따르든지 아니면 믿음의 선진들처럼 그것들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사탄은 교묘한 논리로 우리를 속이는 데 능하다.
우리는 그럴듯한 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의 분명한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타협하지 말라
우리는 세상을 축복하라고 보내심을 받았지,
세상과 타협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유익을 주려는 사람은 큰 능력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
값싼 대가를 지불한 사람은 값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
14장 인간에게 아첨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하라
온전한 메시지를 전하라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개종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상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멍들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방법이나 다 사용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에 따라야 한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하며, 전도 대상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앞세우라
신자들과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철저히 구별되고 바쳐져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그들은 끈질기게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현대의 풍조에서 돌아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 아닌, 영적 세계에서 크신 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세상이 제공하는 도움
이제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후원해야 할 후원자,
또는 사회 저명인사가 있어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어느 인기 가수가 믿는 예수님,
어느 사회 저명인사가 기도하는 예수님,
세계적 유명한 운동선수가 찬양하는 하나님.
그분은 과거 나귀 새ㄲ ㅣ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만,
이제는 저명인사의 명성을 등에 얹고 나아가기 위해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라
현대의 전도자들은 새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옛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불쾌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현대의 기독교가 전하는 새로운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절망감을 느끼게 하려하지 않는다.
15장 재미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재미를 위한 기독교
예수님을 섬기면서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기독교는 '재미를 위한' 기독교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연예오락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참으로 불경스러운 태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 단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또 하나의 다른 연예오락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잘못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종교적 장난감을 버리라
복음주의 신자들 중 대다수가 이 세상을 더 이상 전쟁터로 보지 않고 놀이터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도 보고 세상도 본다.
그들은 아주 밝은 얼굴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해서 즐거운 것들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그런 인생관만큼이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종교 게임
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이를 하듯이 '종교 놀이'를 한다.
교회에도 '경건한 말들을 늘어놓는 게임'을 즐기기 위한 장과 규칙과 게임 도구들이 존재한다.
그 게임에 열성적인 평신도들과 교역자들이 있다.
그들은 돈을 내면서 그 게임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몸으로 출석해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과 인격은 신앙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게임 후에도 여전히 삶의 중요한 부분들은 변하지 않았고,
옛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며, 여전히 옛 아담이 삶을 지배한다.
세상 것들을 버려라
지금은 새로운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때이다.
현대 교회는 '재미'(fun)를 그들 종교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신앙적으로 냉담한 사람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경건의 분야에서는 열정이 식어버린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인데, 바로 이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다른 일들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열성적이고 의욕이 넘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우울하고 침체된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활동에 몰입하거나
종교적 놀이에 의지하지만 실상 이런 방법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는 내면적으로 승리하지 못했고 오히려 패배적이고 우울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지나치게 많은 활동들
우리는 마치 클럽을 운영하듯이 교회를 운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즉시 자신이 거룩한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고 느끼고 얼굴을 바닥에 댄 채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아무리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것이 단지 종교적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의 재능을 사용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이 인간의 일을 하는 것뿐이다.
예배가 반드시 시끄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야단 법석을 떠는 것이 반드시 예배는 아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국의 복음전도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오늘날 교회는 헌신이 아닌 야단법석을 강조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외향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성령님을 기억하라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들을 운영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나
안타깝게도 성령님이 그 주체가 되지 못하며, 주님이 책임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을 끌어모기 위해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방법,
(심지어는 성경에 반하는 방법들까지도)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품이 되어버린 반면, 정말 필요한 영원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다는 것이 비극이다.
활동 중독증 활동
중독증은 기독교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그다지 유익이 되지 못한다.
신앙의 표피만 건드리고 본질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통속적인 활동이 너무 많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종교적 활동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실상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영적인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무익한 활동에서 돌이켜야 한다.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참매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제가 무엇인지 정말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참교제에 대한 성령님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방향을 잃은 교회
방향을 잡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그럴싸한 것들'이라면 무조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에 발을 맞추라고?
현재 유행하는 착각 중의 하나가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요란스러운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게 만든 대단한 착각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전도대상자의 영혼에게 참으로 위험스럽고 악한 것이다.
16장 할리우드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배우라
할리우드가 교회의 스승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예루살렘보다는 할리우드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정도로
세상의 정신 및 세상적인 방법들과 맞닿아 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성인들보다는 오늘날의 연예계 스타들을 모범으로 삼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혀 합당하지 않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대중음악이
참기독교의 순결한 위엄과 반짝이는 순수성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가련한 잡종
세상과 교회의 진정한 연합은 불가능하다.
교회가 세상과 짝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참교회가 아니다.
세상에게는 경멸의 대상이고 주님에게는 가증스럽고 가련한 잡종일 뿐이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성도들'을 배출하지 못한다.
세상에 미혹된 교회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관심과 동기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주는 깊은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예배의 언어를 통해서 예배의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예배의 영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예배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배와 교회생활을 좀 더 견디기 쉽도록 고안해 낸 종교적 오락과 놀이에 의지한다.
인기를 얻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 중에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거나,
가장 시끄러운 사람을 가장 훌륭하고 멋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습관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인기가 곧 탁월함의 증거라고 믿는다.
세상의 방법인가? 하나님의 방법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방법에 의지한다.
우리는 역사적 안목과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활동과 자신의 인간적 열심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 결과, 성경의 방법은 밀려나서 사라지고 만다.
교회 스스로 구멍을 뚫어버렸고 그 구멍으로 세상의 방법들이 흘러들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불경스럽고 불행한 것들이 교회와 예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모든 교회는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의 강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올바른 소식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는 허영의 소리를 향해 열려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높아지기 위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기를 내세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회색지대는 없다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기독교는 교회와 세상이 서로 완전히 반대일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상반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간격을 메워보려고 이 둘 사이에 비성경적이고 불법적인 결합을 성사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이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의 연합은 실상 불가능하다. 세상과 연합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가련한 잡종에 불과하다. 이것은 주께 가증한 것이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오늘날 이도 저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의 교훈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명확하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기독교는 세상과 너무나 뒤엉켜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신약성경의 교훈에서 근본적으로 떠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신자인 체하는 소경들은 회칠한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쓴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과 세상은 서로 양보하며 사이좋게 지낸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 명부에 교인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적이다. 아무리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애를 쓴다고 해서 육이 영적인 것으로 바뀔수는 없다. 학습문답, 세례, 성찬 그리고 신앙고백 같은 것들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아담의 자손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것이 아니요, 육이 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 A.W.토저 / 이것이 성령님이다 -
능력으로 변화된 삶 [펀 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느낄수 있는 공허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부재이다.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은 교회안으로 들어와 웬지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는다.
예배시간에 어떠한 영적 능력이나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설교자의 메세지나 찬송가의 가사에 담긴 내용들이 그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능력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다.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놀라운 일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진다.
영적인 것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신다.
성령님의 능력은 마치 창으로 찌르듯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휘발성 물질이 공기중에 퍼지듯이
그것은 인간의 마음 구석구석으로 퍼져가 소기의 목적을 성취해낸다.
이런 작용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성령님의 능력은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만 이제껏 영혼에 감추어져온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렬히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성령님의 능력을 가장 먼저 체험하게 된다.
그분은 진짜 인격체로 느껴지며, 아주 친밀하고 가까운 분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될 때 다른 모든 영적인 일들이 마음속에서 분명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 죄 사함 그리고 성결의 영 같은 것들이 마치 손에 잡힐듯 분명히 느껴진다.
이전에는 기도가 무의미하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옆에 계신 분과 나누는 달콤한 대화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이 영혼을 가득 채운다.
우리가 천국에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고, 땅과 세상은 그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은 우리의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영구적이다.
그래프의 선이 오르락 내리락하듯이 신앙생활에 약간의 기복이야 있겠지만,
근본적인 방향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능력으로 변화된 삶 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이런 아름다운 삶과 너무 대조되지 않는가?
이것이 성령님이다 /A.W. 토저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에이든 토저, 생명의 말씀사)
그리스도인들의 지금 모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악습들 아니 불신앙들을 잘 정리하여 새로운 변화의 실제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도전의 책이다.
우리 목회현장 본질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질의 영역에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과 목회적 자세의 근원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① 현 상태 깨트리기
② 습관적인 신앙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③ 변화
④ 종말론적인 삶
※ 습관적 신앙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진실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기꺼이 듣고자 하는가? 란 질문에 답하기
1)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관심 결여
2) 세속성
3) 기도의 결핍
4) 부주의함
5) 냉랭한 가슴
6) 교회에 대한 그릇된 오해
◆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개념(엡5:25-27)
(엡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1) 그리스도의 신부(엡5:25-29)
2) 그리스도의 몸(엡5:23)
3) 구원의 방주
※ 습관적인 교회의 모습
1)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 사라짐
2) 영적 갈망의 부재
3) 마음의 냉랭함
4) 기도의 영의 결핍
5) 하나님 임재연습의식의 결여
6) 풍조에 밀림(유행에 따름)
1.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원수(신1:5-8): 일상의 심리에 빠져 있는 그릇된 습관
(신1:5-8)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서 거한 지 오래니 (7)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 (8)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얻을지니라.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장 괴롭혔던 원수: 관습의 독재
※ 종교가 부패되어가는 점진적 삼 단계
1단계: 기계적 단계 → 느낌, 의미, 감격, 행복한 놀라움, 기대감을 상실하고 반복하는 단계
2단계: 습관적 단계 → 기계적 상태의 노예, 자신의 병든 상태에 있음을 모르고 감지할만한 능력도 없는 단계
3단계: 부패한 단계 → 영적 능력, 성장, 변화 소망 결여, 융통성 없는 영적 엄격함, 단순한 성장 경쟁, 1, 2단계의 교인들, 약점 아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 내면적 부패 상태의 3가지 증거
① 자기 의
삶에 변화나 개선을 구하지 않는 것
② 판단
자신을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
③ 자기만족
자기 의가 발전된 상태로 기계적, 습관적 상태에 있으면서도 만족하는 큰 죄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2.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교회 모임(신1:7)
(신1:7)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
1) 3가지 오해
(1)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 본질적으로 내면에 관한 일이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마음 안에 계신다(골: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습관적 상태에 빠지는 것은 내면 안에서 영, 혼,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것.
(2) 교회 본질에 대한 오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지만 개별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개개인들의 몸.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성숙이 교회를 성숙하게 하는 것
외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3)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오해
교회나 모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 내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므로 외적인 수단으로는 잘못된 것을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마5:3-10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엡4:26-5:2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갈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이요 될 수 있는 모습이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방식이요,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다.
2) 자신의 문제 3가지
(1) 회심에 대한 의문
어쩌면 진정으로, 충분하게 회심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2) 개인의 죄로 인한 영적 어둠에 빠짐
자기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습관적 상태에 빠졌다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죽을 시간은 있어도 바빠서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3) 자기의 의에 빠져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
자기 의에 푹 빠져 성령님의 어떤 역사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함.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함.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음.
자기만족은 다른 어떤 육체적인 질병보다, 다른 어떤 육욕의 출현보다 더 무서운 치명적인 원수이다.
자기만족에 빠진다는 것은 성취해보겠다는 의욕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다.
성숙과 변화 그리고 헌신을 통하여 이겨나갈 수 있다.
3. 그리스도인의 잠(엡5:14)
(엡5: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 본능적인 잠(시127:2, 4:8)
(시 127: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본능적인 잠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에 잠자는 것은 나쁜 것이다.
2) 윤리적인 잠(고전15:34)
(고전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을 용납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 이행의 죄와 소극적 불이행의 죄이다.
3) 영적인 잠(엡5:14)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에베소서는 죄인들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가장 훌륭한 교회들 중의 한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이다.
그들은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자들이 여전히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지 못했다.
선량하고 신실하며 충성스러운 교인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잠자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무의식 상태가 되어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4) 문제점
(1) 잠든 자들이 교회의 중요한 부분을 좌지우지 한다는 점
(2) 그들이 새로운 신앙인들의 모본이 된다는 점
(3) 신앙의 표상은 말하면서. 그들처럼 살려고 희생하고 헌신하지는 않는다는 점
4. 습관적 상태에 빠져 있는 교회(신1:6-7)
(고전 10:1-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1:6-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서 거한 지 오래니 (7)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
이와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습관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1) 무디어진 종교적인 감정들
2) 악순환의 무덤, 습관적인 상태
3) 습관적인 상태의 원인 3가지
(1) 진정한 회심과 회개의 결핍
(2) 징계를 받아 사단에게 넘겨진 상태(고전5;4-5, 고전11:28-32)
(고전 5:4-5)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28-32)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 죄가 원인
※ 죄의 세 가지 형태
① 불이행의 죄: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일을 행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는 것.
② 이행의 죄: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
③ 육신의 죄: 불 경건, 그릇된 야망, 돈에 대한 사랑, 땅에 속한 일을 과대평가하는 것, 질투와 열심 등 육신이 범하는 죄들.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빌2:5)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5. 탈출의 방법(빌2:12-13)
(빌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을 두고 행하라,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
1) 하나님과의 협력(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 바람직한 하나님의 목적 설정과 합법적인 수단(요14:21, 23-24)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3) 순종:
우리의 사랑을 입증함(엡5:22, 눅12;1-3처럼)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어린아이처럼(눅12:8, 요14:21, 눅12:15)
(눅 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서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성도들에게는 기도의 능력, 순종의 기쁨, 하나님의 임재라는 달콤한 신비가 있다.
5) 개인의 성숙(딤후1:3-8)
(딤후 1:3-8)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1) 개인의 회개
(2) 메모
(3) 신앙의 질문들을 하라
6. 영적인 3가지 법칙(롬12:1-2)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법칙: 포기의 법칙: 자신의 의를 위한 삶의 포기
여러분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외과의사는 자신의 생명을 내맡겨야 수술 할 수 있다).
2법칙: 집중의 법칙: 한가지로 섬겨라……. 자기의 우상을 버려라
성공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비결은 집중력이다.
시간을 투자해 집중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음악가, 운동선수, 과학자 등).
3법칙: 매료의 법칙: 하나님께 매료되어라
어떤 저항할 수 없는 매력 때문에 마술에 사로잡힌 것처럼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는 것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로 와서 내게 매혹 당하라. 나에게 집중하라. 나에게 복종하라. 나에게 완전히 순복하라. 네게 있는 모든 것을 내게 다 주도록 하라 -예수님으로부터.
(시 104:1-6)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6)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사 40:12-14)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골 2: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15-17)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7. 새로운 신앙의 모습들(슥4:6)
(슥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1) 아름다운 단순성
2) 찬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3) 겸손한 경외심
4) 기쁨에 넘쳐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분위기
5)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여기는 상태
6) 어린아이 같은 솔직함
7) 이중적 삶으로부터 벗어남
8)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임재
9) 기도의 회복
※ 당신의 교회에서는 어떤 새로운 교회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8 어떻게?
첫째 : 보편교회에 들어가기(마10:40)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둘째 : 공적 신앙고백(롬10:8-10)
(롬10:8-10)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셋째 :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되라(고전 12:27)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보편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공적인 신앙고백이 필요하고 반드시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 모델교회의 특징(살전1:8-9)
(살전1:8-9)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 하나님 나라의 절대 가치를 두고 사역함
우리는 시민권은 즉시 변한다.
1190(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1.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후렴: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2. 나는 순례자 방황하지만 예수 내 구주 이끄시네 영광의 나팔 소리 들릴때 천사 날 위해 찾아오리
3. 나는 순례자 피곤한 몸을 하늘나라에 누이시네 주 볼 때마다 영광 나타나 승리를 위해 찬양하리
(2) 경배의 보고(요4:24)
우리는 경배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3) 증거의 역사
우리는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4) 선한 일에 열심(요20:21, 딛2:14)
우리는 일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삶의 방식에 변화(마16:24)
우리 삶의 방식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5) 믿음의 음성(사 42:16, 계3:20)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사 42: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자기를 사랑하면 우상숭배다!!
A. W. 토저 생애 공식 석상에서 한 마지막 불꽃 메시지
자아가 죽지 않아 자아를 내세우며
예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예수를 ‘주’主(주인님)라고 부르지 말라!
이 시대의 선지자 토저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눈물의 회개 없이 ‘싸구려 영접주의’로
하나님나라에 불법적으로 월장(越牆)해 들어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고 고발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됨의 대가를 지불한다.
예수 혼자 죽는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도 같이 죽는 십자가로 믿어야 한다.
-한국어판 편집자의 글 중에서
자기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아를 지탱해줄 다양한 보조 장치에 의지하고,
교만에 영양분을 공급하며, 자신의 결점을 숨긴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계속 받으면,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과 실제 인격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자아의 옛 생명에 헝겊 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참된 기독교는 ‘나’와 ‘나 자신’과 ‘나를’에 얽매여 있는
자아(自我) 중심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목에 힘을 주고 뽐내며 걸으면서
당신의 자아를 가꾸는 일을 계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자아를 교양 있고 세련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를 끝장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만 과거의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자꾸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자꾸 커져야 한다.
-본문 중에서
영적인 사람의 표
A. W. 토저
영성의 개념은 기독교 집단 가운데 다양합니다.
어떤 집단에서는 끊임없이 종교를 논(論)하는 말 많은 사람을 매우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란한 것을 영성의 표(標)로 인정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을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활발하게 증거하고, 자주 기도하며,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이 영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본질적으로 영성을 구성하거나 영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이루고자하는 소망들 가운데 드러납니다.
이러한 소망은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통제하기에 충분한 강력한 것들로, 삶 가운데 항상 존재하며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필요들입니다.
다음은 이러한 소망에 관해 기술한 것으로서, 중요성에 따라 순서를 정한 것은 아니며,
편의상 번호를 부여한 것입니다.
1. 첫째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스스로 높이 성화되었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
흔히 보는 행복해지기를 열망하는 모습은 실제로 그러한 성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
그 기쁨이 우리 영혼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가 된 후에야 풍성한 기쁨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즉시 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죤 웨슬레는 초기 감리교 집단 중 한 집단의 회원들에 대해,
그들이 거룩해지는 법을 배우려는 대신에 종교를 즐기려고 교회에 왔기 때문에 그들이 과연 사랑 안에서 완전해졌는지 의심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2.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일시적으로 수치를 당하거나 해를 입더라도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예가 더욱 드러나는 것을 보기 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조용히 "주님, 이를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나이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는 일종의 영적인 행동 양식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여 삽니다.
그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혼자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사숙고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는 마치 숨이 막힌 사람이 헐떡이며 공기를 마시려고 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갈구합니다.
3. 영적인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탄식하며 역경이나 환난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환난과 역경이 성도와 죄인에게나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한 결과로 우리에게 임하는 역경입니다.
이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 결과를 익히 알면서 자원하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로 결정하며,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자신을 맡기며,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와 같이 사랑하며, 그와 같이 맡기며, 그와 같이 순종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4.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자로 재며,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평가하는 능력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표(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물을 바라보심과 동시에 꿰뚫어보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사물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사물의 참된 의미를 꿰뚫어 보십니다.
세속적인 기독교인은 대상이나 상황을 바라만 볼 뿐,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보는 것으로 우쭐대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사물을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꿰뚫어 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듯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록 모든 사물을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보는 것이 그를 고통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비천하게 만들며 그의 무지를 드러낼지라도, 그는 그같이 보기를 주장합니다.
5. 영적인 사람의 또 다른 소망은 부당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성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표(標)는 삶에 대한 의연함입니다.
세속적인 삶을 사는 육감적인 그리스도인은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마비된 채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령님 안에서 살기 시작함에 따라, 그는 점점 이 세상에서의 연수(年數)에는 무관심하게 되며, 동시에 점점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의 본질을 더 주의하게 됩니다.
그는 타협하거나 실패하면서 몇 날을 더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남은 날들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지만, 부당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생각과 행동을 견고하게 하는 회전의(回轉儀)가 됩니다.
(회전의 : 회전하는 팽이를 세 개의 회전축에 의해 자유로이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지지(支持)하고 있는 장치. 여기서는 생각과 행동의 요동을 막는 안전장치의 의미로 사용됨 - 譯者 註)
6.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의 표(標)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보기 원하며,
그들이 승진하여 자신을 내려다 볼 때에 즐거워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질투심이 없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땅에서의 하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로 인해 기뻐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높이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기꺼이 그렇게 합니다.
7. 영적인 사람은 항상 일시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영원한 판단을 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과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서,
이미 세상을 떠나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총회 곧 하늘에 기록된 처음난 자들의 교회에 참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한 사람은 유명해지기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자 하며,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려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결코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경배(예배)
(A. W. 토저)
참 경배(예배)가 아닌 경배(예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지만 그중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경배가 많다는 것이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경배는 참 경배가 아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수백만의 교양 있는 크리스천들이 단지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습적으로 경배를 드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께 상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잠을 이루기 힘들다.
많은 현대인들이 경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생각할 때 나는 마음이 무척 불편하다. 은밀히 사람들을 조정하거나 교묘한 방법을 써서 경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참 경배가 아니다. 나는 교인들이 목회자를 가리켜 ‘영적 기술자’라고 부를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가?
당신이 삶의 각 부분들을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경배를 드리고 다른 부분은 경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참 경배가 아니다.
교회에서만 경배를 드린다거나, 위험한 폭풍이 불어 닥치거나, 혹은 자연의 신비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을 때만 경배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아찔할 정도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커브 길에 섰을 때 아주 영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참 경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 경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경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 찾아와, 마치 거울에 반사하듯이 다시 그분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이런 경배가 아닌 다른 경배는 받지 않으신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들이 있음을 내가 안다면,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는 경배를 드릴 수 없다. 내가 주일에 즐겁게 하나님을 경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에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나는 주일에 참 경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주일에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했다 할지라도, 월요일과 화요일에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나는 주일에 참 경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나의 경배관(敬拜觀)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조금도 없을 때, 비로소 그분은 나의 경배를 온전히 기뻐하신다.
가인에게서 배우는 교훈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경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구약에서 그분은 가인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경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첫째,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즉 속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가인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둘째,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가인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없이도 그분이 자신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태평하게 믿었다.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셋째,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이것은 가인뿐만 아니라 가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의 기록을 자세히 읽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용의가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신다. 죄 때문에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인생 최고의 목적과 기쁨, 즉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가인이 드린 경배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경배였다. 이것을 지금의 신약시대에 적용해서 말해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가르치기 거부하는 교회가 있다면, 나는 그런 교회에서는 단 한 시간도 경배를 드리지 않을 것이다.
공허한 경배를 드리는 교회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경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경배 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불길한 결핍 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충분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예복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 음악, 시(詩), 그림, 웅변술, 엄숙한 말투, 좋은 음향시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경배자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는다. 그러나 종종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을 때가 있다. 목회자와 회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말 그대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여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 일을 쉽게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당신의 삶이 경배하지 않는다면, 결국 당신의 입술도 경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전부, 즉 우리의 삶 전체가 경배해야 한다. 믿음, 사랑, 순종, 충성, 행위, 생명, 이 모든 것들이 경배에 동참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참 경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죽음의 목전에서, 장엄한 신비 앞에서, 우리의 영성이 깊어진다고 믿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사마리아인의 경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단적(異端的)인 경배를 뜻한다. 이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은 거부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단적 경배, 즉 사마리아인의 경배이다.
“자연 경배”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시(詩)이다. 이것은 장엄한 자연을 즐기며 명상하는 것이다. 자연 숭배자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아주 많다. 그들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을 미(美)에 집중시킨다. 당신의 귀가 미(美)에 집중할 경우 그것은 음악이 되고, 당신의 눈이 미(美)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미술이 된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 없이 아름다운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시(詩)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 음악을 경배로 착각한다. 마음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거의 몰아(沒我)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경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경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경배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신다.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전부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교인들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다.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참 경배는 아니다. 참 경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경배하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이다. 또한 그것은 회심과 거듭남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오직 머리에 ‘장엄함’이라는 혹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구속과 관계없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회심하지 않고서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 가인도 종교적 체험을 했다. 가인은 하나님께 말씀드렸고, 하나님도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이 구원과 관계없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배를 드리지만 잘못 경배드릴 수 있다.
경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든지 경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이다. 성령님 없이 우리가 경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의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異端)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준엄한 메시지
먼저 경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도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오직 경배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경배 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언젠가 착각에서 깨어날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육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경배이다. 경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복음에 따른 실천적 삶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섬김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일보다 경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이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
나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제아무리 무해(無害)하게 보일지라도 나의 적(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에 대해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생활의 근심 걱정 때문에 성경을 멀리한다면 큰 손실을 입을 것이며, 또한 그 손실은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성경 대신 다른 무엇에 의지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도둑맞고 사기를 당해 영원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이상(理想)은 우리가 최대한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부분이 내 존재 안에 있으면, 내 존재 안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시간, 장소, 날, 달, 해를 성별(聖別)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쓰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아멘!
온유와 평안
A.W 토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인간의 심성과 행위와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려면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을 거꾸로 뒤집어서 말하면 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인간의 생활과 행위는 그 보훈에서 말씀한 미덕과는 정 반대인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계시하셨던 그 덕성들의 어느 하나도 오늘의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보는 대신에 언어도단의 오만과 불손이 횡행함을 볼 뿐이요, 애통하는 자를 만나는 대신에 안일과 향락을 구하러 헤매는 자들을 만날 뿐이다. 온유 대신에 거만을, 의에 굶주린 자 대신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하는 자들을 만날 뿐이다. 자비 대신에 가혹함 뿐이요, 청결한 마음 대신에 부패한 심정 뿐이요, 화평케 하는 자 대신에 노기가 충만한 자들뿐이다. 또한 오늘의 세상은 해를 받고도 기뻐하는 자 대신에 손에 닫는 온갖 흉기를 휘둘러 반항할 줄밖에는 모르는 자들뿐이다.
이와같은 비도덕성 위에 오늘의 문명사회는 기초하였다. 이 악기(惡氣)를 머금고 포화상태에 있는 공기를 우리는 분초마다 호흡하고 있다. 영아들까지라도 어미의 젖에서 이것을 빨고 있다.
교육과 문화는 이것에 대하여 하등의 개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문학은 이와같은 세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실로 그 진상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 교육, 문화, 문학은 본시 인생을 향상시키는 사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도리어 그것이 인생의 부패를 조장하는 것이 되어 있는 사실이다.
인생의 모든 번민과 육체적 고통의 대부분은 직접 우리의 죄의 결과이다. 교만, 허식, 분노, 부패한 심리, 증오심, 탐욕 ― 이런 것들은 그 어떤 가혹한 질병보다도 더 심각한 고통을 인간의 영육에 주어 오고 있다.
이와같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던진 말씀 속에는 하늘의 특이성과 신실성이 가득차 있다. 이렇게 말씀할 이는 그밖에 없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음이 실로 복된 일이다.
그 말씀은 진리의 진수이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다. 예수는 의견이라는 것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추측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알았고, 지금도 안다.
그의 말씀은 솔로몬의 말과 같은 깊은 지혜의 결정체도 아니요 날카로운 관찰의 기록도 아니다. 그의 말씀은 그에게서 충일하는 그의 신성의 발현이며, 진리 자체이다.
그는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할 수 있었던 오직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는 인간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위로부터 내려온 복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일찍 땅 위에서 행하여졌던 어떤 다른 사람들의 행동보다도 가장 투철한 행동에 의하여 실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예수의 어태(語態)에서 우리가 항상 찾아보는 바이지만 여기에 "온유"라는 말씀은 지극히 간단명료하게 쓰여 있다. 이 말의 뜻을 그는 그 후에 다음과 같이 좀더 풀이하여서 우리의 생활과 연결시켜 놓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28∼30).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개념 ― 무거운 짐과 쉼, 멍에와 평안이 결부되어 있음을 본다. 이 무거운 짐은 결코 어느 일부의 인간에게만 국한된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 인류가 지고 가는 멍에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압제라든가 빈궁이나 노역(勞役)의 고통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멍에는 그런 고통보다도 훨신 혹독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가지로 겪는 것으로서 재물이나 안일로써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이 지고 가는 멍에는 무겁고 애닮다 예수께서 말씀한 인생의 멍에는 마침내 기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지고 가는 짐이다.
쉼이란 이 멍에를 벗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무엇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행하기를 멈춤으로서 벗게 된다. 예수의 온유가 곧 쉼이다.
우리의 멍에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심적 원인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내심에서 발하여 우리의 영과 육을 쏘는 것이다.
첫째의 멍에는 교만이다.
자기 중심이라는 짐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것이다. 그대 자신을 고요히 반성해 보라. 그러면 그대의 번민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그대를 과소 평가했다는 데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는 우상을 우리 마음에 모셔 두는 한 그 우상을 모욕하기를 좋아하는 대적은 항상 우리 앞에 있다. 따라서 심령의 평안이란 바랄 수 없게 된다. 사소한 비평에도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애써 제어하는 노력과, 친구와 대적들의 비방에 일일이 마음을 써가며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곤욕 중에도 큰 곤욕이다. 이런 마음의 암투(暗鬪)는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며, 그것은 점점 더 격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의 아들들은 이 멍에를 끈기있게 메고 나간다. 그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한마디 한마디에 반항하며, 사소한 비평마다 애간장을 태우며 머리를 쥐어뜯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잠을 못잔다.
이런 멍에는 메고 갈 필요가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 멍에를 벗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 방법은 곧 온유한 심령을 가지는 일이다.
온유한 사람은 누가 나보다 크냐 적으냐를 관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의 평가라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안정된 마음으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줄을 안다.
"오오, 자네가 무시를 당했단 말이지? 그래, 그들이 자네 대신에 그 사람을 뽑았군 그래. 그들이 자네는 보잘 것 없는 자식이라고 수군거렸단 말인가? 허허, 그래서 자네 자신이 바로 어제 자네에 관해서 한 말을 오늘은 세상이 했다고 해서 심사가 불안하단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바로 어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먼지 속에 기어 다니는 벌레보다도 못한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도 자네는 신실성이 빈약한 사람인가? 자, 겸손하세, 남의 말을 근심할 것이 무엇인가?"
온유한 사람이란 비굴한 열등감에 눌려서 남의 말을 듣고 일희일우(一喜一憂)하는 졸장부가 아니고, 사자와 같이 대담하게 삼손과 같이 힘차게 자신의 도덕적 긍지를 지켜 나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이는 하나님뿐임을 믿고 있으며, 자신의 교만이나 남의 평론에 의해서 경거망동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그는 자신이 극히 미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눈에는 천사보다도 귀중한 자신임을 그는 믿는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시듯이 세상은 자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평가를 개의치 않는다. 자기의 진가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는 완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마침내 만물이 각기 그 정가표를 붙이는 날이 오는 것을 그는 믿고, 초조해하지 않고 그 날을 기다린다. 그 날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그 날을 그는 흔연히 기다린다.
동시에 그는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게 된다. 온유한 걸음을 걷는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도록 기꺼이 몸을 내어 맡긴다. 자신이 자신을 지키려던 옛 노력은 끝났다. 그러므로 그는 온유가 주는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허식의 멍에를 벗을 수 있다.
허식은 위선과는 좀 다르다. 허식이란 내 내적 빈곤을 감추기 위해서 나의 제일 좋은 면만을 내세우려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말한다. 죄가 인간의 심리를 기형화한 여러 가지 부자연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은 수치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남의 앞에서 소위 체면이란 것을 꾸미지 않고 자기 그대로를 나타내는 남녀를 만나 보기란 어렵다. 오늘 세상에는 자기의 정체가 폭로되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심장을 조리고 사는 사람이 허다하다.
소위 품위가 있다는 사람은 어느 때이건 자기보다 더 높은 품위의 인물을 만날 일이 두려워서 전전긍긍하며, 유식한 사람은 나보다 더 유식한 사람을 대하게 되는 은밀한 불안을 늘 면치 못한다. 부자는 어느 날이건 자기의 옷차림, 자동차, 주택이 다른 어떤 부자의 그것에 비해서 빈약하게 보일 일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식은 땀을 흘리곤 한다. 또 낮은 계급은 낮은 계급대로 역시 같은 허식의 집단들을 이루고 있다.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이를 일소하지 말라. 이 멍에는 심각한 것이며, 이 부자연한 생활 방식은 점진적으로 희생물의 목을 졸라 들어가는 괴물인 것이다. 오늘의 심리학이란 이와같은 인간의 변태심리를 기준하여 꾸며졌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온유라는 것은 꿈과 같은 비현실적이며 하늘의 별같이 머나먼 것으로 무시되고 있다.
이 생명을 잠식하는 악성의 질병에 신음하는 모든 인간을 향하여 예수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마 18:2∼5).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비교하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가진 것을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려 하지 않고, 가진 그것에서 직접 기쁨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키가 자람에 따라서 죄가 그들의 심성을 휘저어 놓는 결과로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시기심이 눈을 뜨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아이가 나보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가졌을 때에는 벌써 전과 같이 내가 가진 것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이 얄궂은 멍에는 인간의 영혼을 내리누르기 시작하며, 예수께서 그것을 벗겨 주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벗지를 못한다.
또 하나의 멍에는 기교를 부리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건 뜻하지 않은 사이에 내 속마음을 친구들이나 원수들이 들여다 봄으로서 자기의 내적 공허가 폭로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한 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소위 말재주가 있다는 사람들은 혹 어쩌다가 실수를 해서 평범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할까 두려워서 수시로 긴장해 있다. 견문이 넓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혹시 다니다가 자기가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본 일이 있는 "마르코폴로"를 만날까 해서 두려워 한다.
이 모든 부자연한 현상들은 우리가 물려 받은 죄로 인한 슬픈 부산물들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전체 생활면에 이것은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뻗고 있다. "광고술"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인간의 이 가장하는 성향을 응용한 것이다. 나 이외의 것으로 보이려는 인간의 이 욕망에 영합(迎合)하여 무수한 책, 화장품, 의류가 팔리고 있다.
이 가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온유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만 우리의 어깨에서 벗어져 떨어지는 저주받을 멍에다. 일단 이 멍에를 예수 앞에 풀어놓은 후 부터는, 우리 심령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를 추구하려는 생각이, 전에 사람의 눈, 귀를 두려워하던 모든 생각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가 내 전체가 되고, "어떻게 나타날 나"는 우리의 관심권내에서 멀리 사라지고 만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우리가 가장을 하려는 심성은 오직 허세를 부려보려는 악한 욕망에서 오는 것이다.
이 교만과 허식의 멍에 밑에서 이 세계는 바야흐로 쓰러져 가고 있다. 이 위경을 면하는 길이란 예수의 온유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없다. 엄격한 도덕 생활이 극히 적은 효과를 줄 수는 있으나, 그러나 이 죄악은 비상하게 뿌리깊기 때문에 한 쪽 모를 누르면 다른 모가 튀어 나오고 만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을 향해 부르신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가 계시하시는 평안은 온유의 평안이며, 또 그 평안은 우리의 가식을 그치고, 솔직히 나 자신을 받아들일 때에 얻어지는 즐거운 해방인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약간의 희생을 요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이 멍에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같이 메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충족한 은혜 속에 묻히게 된다. 예수는 이 멍에를 "내 멍에"라 부르셨고, 우리와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이것을 메고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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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어린 아이와 같게 하소서. 지위, 권력, 명예, 이익을 얻으려는 고통에서 저를 건지소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꾸밈없기 원합니다. 허영과 가식을 버리게 하소서. 자아 중심적인 저를 용납하고 도우사 세상지향적인 나를 부인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참 평안을 얻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원하여, 주 앞에 겸손히 엎드리나이다. 그것을 짊어짐으로써만 제가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온유의 멍에, 주님의 "쉬운 멍에"를 제게 지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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