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온 땅의 구음도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행위와 생각은 하나님 앞에 큰 반역과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십니다.
창세기 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때까지 써오던 말을 상대방에게 했는데 상대방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방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들 즉 방언들은 말하는 한사람 한사람이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지만 말하는 자신도 모르는 뜻모를 소리를 말하게는 하지 않으셨 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방언의 시작은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위해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고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통해 막으신 것입니다.
그후 시간이 많이 흘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그당시 주변 왕들에게는 위협적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의 왕 발락은 당대 유명한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멸절 시키려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을 막으셨습니다.
"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
그럼에도 발람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발락의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보리라 " ( 민수기 22:18 ~ 19 )
발람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 선지자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발람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 말씀 따라 간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심따라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욕심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모압 귀족들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행함을 인하여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섰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은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였고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는 막다른 곳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였고 발람은 화가나서 다시 채찍질하였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데 없는 좁은 곳에 섰고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렸습니다.
발람은 더욱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발람은 자신의 욕심 따라 가다가 기이한 일을 체험합니다.
민수기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민수기 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민수기 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신 것이 었습니다.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나귀가 방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나귀는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발람 선지자는 제정신이 돌아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민수기 22: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민수기 22: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민수기 22: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하나님은 미친 짓을 하러 가는 발람 선지자를 나귀의 입을 열어 즉 방언( 정확한 사람의 언어 )을 통해 미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의 보고 그의 보충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발람은 나귀의 말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시대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와 방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발람의 미친행동에 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베드로후서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여기까지 구약시대에 방언에 대한 기록입니다.
결국 구약의 방언의 용도는 좋은 의미의 용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친짓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시작되었고 사용되어 졌습니다.
좀 충격이 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는 너무 해석이 앞서 간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깊이 상고 한다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신약 시대로 넘어오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힘써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에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독실한 자들 곧 유대인들이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아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가 함께 와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말로 말하는 것을 각 사람이 들으므로 당황해 했습니다.
"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
(KJV흠정역) 사도행전 2:11
방언을 말한 사람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7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며 서로 이르되,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방언을 통해 들은 내용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14 절 이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쉽게 그 내용을 추론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리셨다 "
이런 간단한 내용들이 방언을 통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나귀 입을 열어 발람 선지자에게 말할 때 발람이 온전히 이해 못했던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KJV흠정역) 사도행전 2:12 그들이 모두 놀라 의심하며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더라.
정확하게 말하면 방언으로는 한계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 선지자에게 보충 설명을 한 것 처럼 결국 베드로의 보충 설명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의 방언도 메시야가 오셨고, 그들은 그 메시야룰 몰라보고 죽였고, 부활한 메시야 예수님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 했다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신약시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실한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탑 사건으로 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방언의 사건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방언은 우리가 알아왔던 그런 신비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닌 정신줄 놓고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깨우거나 책망하고 미친짓을 금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방언은 비언어가 아닌 정확히 외국어였고 듣는 자는 그 말을 똑바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방언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고린도 교회를 통해 다른 용도로 변질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파벌이 있었고,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 특히 은사의 혼란 스러운 문제는 예배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보면 천사의 말을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 신구약에서 나타난 천사들이 쓰는 단어는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을 가지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있고 또한 그것을 믿는것 같습니다.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은혜롭다 그럽니다.
그럼 그것이 천사의 말 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말하는 당사자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천사의 말이라고 믿는 타인 믿음입니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세상 어느 사람도 증명 할 수도 증명해 줄수도 없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고린도시대나 요즘에도 믿고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우리에게 웃으면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이탈리아 말이나 독일어로 말한다고 합시다.
그럼 그 말을 웃으면서 한다고 칭찬하는 말이라고 단정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을 통역 할 수 있는 통역관이 오기전까지는 아무도 그 말의 뜻을 해석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차라리 요즘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되는 비언어적 방언이라 생각하면 딱 맞을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타언어들(방언)의 사용 조차 타인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6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가서 타언어들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대언이나 교리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리요?
고린도전서 14:26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그러나 비언어적 방언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굳이 성령님께서 비 언어적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고 또한 통역의 절차를 거칠 필요가 교회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가?
고린도전서 14:14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거니와 나의 이해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4:27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그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4:37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대언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의 명령들인 줄 인정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4:38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거든 알지 못하게 둘지니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어왔던 비언어적 방언에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9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한 것을 어찌 알리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리라.
우리는 그동안 비언어적 방언들을 영의 비밀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를 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적인 열매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적으로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알수없는 비언어적 언어(방언)로 기도해 왔습니다.
그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채 말입니다.
고린도서의 방언에 대한 정의는 개인적인 기도용이 아닌 타인을 위한 전도용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2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
결론입니다.
신구약을 통해 본 방언은 뷴명히 상대방이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언어적방언 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방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징계하고 그치게하고, 미친짓을 하는 것을 금하게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야로 얼지 못하는 자들의 우둔한을 깨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는 방언기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방언을 은사의 관문이라는 헛된 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있습니다.
이런 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방언을 기점으로 수많은 직통계시와 폐단이 있어 왔고 방언을 통해 종교 통합을 이루는 귀한 일등공신 역활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또한 비언어적 방언
럴랄라, 따따따, 카샤라바샤, 등 에서 벗어나
개소리 , 닭소리 등의 동물소리 방언을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기도라 해서
팍팍팍, 쉭쉭, 파파, 등의 온갖 소리도 냅니다.
이런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께서 나귀입을 여셨을 때 나귀도 정확히 사람의 말을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정확한 이성적인 말을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동물의 소리를 흉내 내어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귀있는 자는 들으시고 주님께서 주신 이성적으로 생각하시고 분별하십시요!
마지막으로
저는 삼십년 이상 방언기도 열심히 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깨닫는 은혜로 이제는 성경을 근거한 기도로 기도합니다.
똑똑히 한국 말로 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들으며 기도하고 때로는 타인들을 위해 기도해도 기도양은 방언기도 양을 능가합니다.
절대 자랑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알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 할 때 보다 더 마음과 정신이 말씀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고 제 삶과 내면에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가지고 논쟁하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요.
선택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부탁하고 싶은것은 이때까지의 경험과 이론을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셔서 하루속히 진리에 눈을 뜨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이때만 해도 온 땅의 구음도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행위와 생각은 하나님 앞에 큰 반역과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십니다.
창세기 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때까지 써오던 말을 상대방에게 했는데 상대방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방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들 즉 방언들은 말하는 한사람 한사람이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지만 말하는 자신도 모르는 뜻모를 소리를 말하게는 하지 않으셨 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방언의 시작은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위해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고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통해 막으신 것입니다.
그후 시간이 많이 흘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그당시 주변 왕들에게는 위협적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의 왕 발락은 당대 유명한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멸절 시키려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을 막으셨습니다.
"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
그럼에도 발람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발락의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보리라 " ( 민수기 22:18 ~ 19 )
발람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 선지자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발람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 말씀 따라 간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심따라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욕심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모압 귀족들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행함을 인하여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섰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은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였고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는 막다른 곳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였고 발람은 화가나서 다시 채찍질하였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데 없는 좁은 곳에 섰고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렸습니다.
발람은 더욱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발람은 자신의 욕심 따라 가다가 기이한 일을 체험합니다.
민수기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민수기 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민수기 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신 것이 었습니다.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나귀가 방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나귀는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발람 선지자는 제정신이 돌아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민수기 22: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민수기 22: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민수기 22: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하나님은 미친 짓을 하러 가는 발람 선지자를 나귀의 입을 열어 즉 방언( 정확한 사람의 언어 )을 통해 미친 행동을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의 보고 그의 보충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발람은 나귀의 말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시대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와 방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발람의 미친행동에 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베드로후서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여기까지 구약시대에 방언에 대한 기록입니다.
결국 구약의 방언의 용도는 좋은 의미의 용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친짓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시작되었고 사용되어 졌습니다.
좀 충격이 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는 너무 해석이 앞서 간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깊이 상고 한다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신약 시대로 넘어오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힘써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에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독실한 자들 곧 유대인들이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아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가 함께 와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말로 말하는 것을 각 사람이 들으므로 당황해 했습니다.
"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
(KJV흠정역) 사도행전 2:11
방언을 말한 사람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7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며 서로 이르되,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방언을 통해 들은 내용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14 절 이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쉽게 그 내용을 추론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리셨다 "
이런 간단한 내용들이 방언을 통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나귀 입을 열어 발람 선지자에게 말할 때 발람이 온전히 이해 못했던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KJV흠정역) 사도행전 2:12 그들이 모두 놀라 의심하며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더라.
정확하게 말하면 방언으로는 한계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 선지자에게 보충 설명을 한 것 처럼 결국 베드로의 보충 설명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의 방언도 메시야가 오셨고, 그들은 그 메시야룰 몰라보고 죽였고, 부활한 메시야 예수님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 했다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신약시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실한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탑 사건으로 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방언의 사건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방언은 우리가 알아왔던 그런 신비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닌 정신줄 놓고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깨우거나 책망하고 미친짓을 금하는 도구로 하나님은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방언은 비언어가 아닌 정확히 외국어였고 듣는 자는 그 말을 똑바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방언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고린도 교회를 통해 다른 용도로 변질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파벌이 있었고,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 특히 은사의 혼란 스러운 문제는 예배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보면 천사의 말을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 신구약에서 나타난 천사들이 쓰는 단어는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을 가지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있고 또한 그것을 믿는것 같습니다.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은혜롭다 그럽니다.
그럼 그것이 천사의 말 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말하는 당사자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천사의 말이라고 믿는 타인 믿음입니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세상 어느 사람도 증명 할 수도 증명해 줄수도 없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고린도시대나 요즘에도 믿고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이 우리에게 웃으면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이탈리아 말이나 독일어로 말한다고 합시다.
그럼 그 말을 웃으면서 한다고 칭찬하는 말이라고 단정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을 통역 할 수 있는 통역관이 오기전까지는 아무도 그 말의 뜻을 해석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차라리 요즘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되는 비언어적 방언이라 생각하면 딱 맞을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타언어들(방언)의 사용 조차 타인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6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가서 타언어들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대언이나 교리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리요?
고린도전서 14:26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그러나 비언어적 방언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굳이 성령님께서 비 언어적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고 또한 통역의 절차를 거칠 필요가 교회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가?
고린도전서 14:14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거니와 나의 이해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4:27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그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4:37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대언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의 명령들인 줄 인정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4:38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거든 알지 못하게 둘지니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어왔던 비언어적 방언에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9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한 것을 어찌 알리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리라.
우리는 그동안 비언어적 방언들을 영의 비밀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를 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적인 열매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적으로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알수없는 비언어적 언어(방언)로 기도해 왔습니다.
그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채 말입니다.
고린도서의 방언에 대한 정의는 개인적인 기도용이 아닌 타인을 위한 전도용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2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
결론입니다.
신구약을 통해 본 방언은 뷴명히 상대방이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언어적방언 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방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징계하고 그치게하고, 미친짓을 하는 것을 금하게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야로 얼지 못하는 자들의 우둔한을 깨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는 방언기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방언을 은사의 관문이라는 헛된 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있습니다.
이런 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방언을 기점으로 수많은 직통계시와 폐단이 있어 왔고 방언을 통해 종교 통합을 이루는 귀한 일등공신 역활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또한 비언어적 방언
럴랄라, 따따따, 카샤라바샤, 등 에서 벗어나
개소리 , 닭소리 등의 동물소리 방언을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기도라 해서
팍팍팍, 쉭쉭, 파파, 등의 온갖 소리도 냅니다.
이런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께서 나귀입을 여셨을 때 나귀도 정확히 사람의 말을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정확한 이성적인 말을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동물의 소리를 흉내 내어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귀있는 자는 들으시고 주님께서 주신 이성적으로 생각하시고 분별하십시요!
마지막으로
저는 삼십년 이상 방언기도 열심히 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깨닫는 은혜로 이제는 성경을 근거한 기도로 기도합니다.
똑똑히 한국 말로 말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들으며 기도하고 때로는 타인들을 위해 기도해도 기도양은 방언기도 양을 능가합니다.
절대 자랑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알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 할 때 보다 더 마음과 정신이 말씀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고 제 삶과 내면에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가지고 논쟁하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요.
선택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부탁하고 싶은것은 이때까지의 경험과 이론을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셔서 하루속히 진리에 눈을 뜨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출처 : 천국 가는 길
글쓴이 : 다니엘 원글보기
메모 :
'성경의개관(지식,용어해설,상식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0) | 2013.11.13 |
---|---|
[스크랩]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0) | 2013.11.13 |
[스크랩] 천년왕국 (0) | 2013.10.24 |
[스크랩] 영적교만과 육적교만 (0) | 2013.10.21 |
[스크랩] 세상보다 교회안에 마귀가 더 많습니다(조스피스) (0) | 201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