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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파일을 누르시면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뭍힌 선교사의 사역이 소개가 나옵니다.)
베델의 묘 - 구한말 대한매일신보 창간하여 억눌린 한국인들을 대변한 인물입니다. 그는 민족 지사들을 신문사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 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습니다. 1909년 5월1일 37세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1910년 양화진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로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습니다. 해방후 20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비를 세웠는데 지금 양화진에 있는 비문이 이것입니다
언더우드 가족묘 7기 -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1885년 4월 부활절 26세때 내한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선교활동, 후배 선교사 초청, 성서번역, 새문안교회(최초의 장로교회)설립, 연세대학교 설립 등 선교초기 그의 헌신은 한국에 많은 교회와 사회 곳곳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혼여행으로 전도여행을 가다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입니다. 선교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가족묘역에는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묻혀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5일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언더우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북한지방으로 여러차례 전도여행을 가서 그곳에 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세례 신청자 들이 많이있었던것은, 로스선교사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주에서 번역된 신약성경이 북한 지방에 두루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는 8살연상의 릴리아스호튼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들은 신혼여행 조차 전도여행으로 다녀올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문답을 통과한33명의 남자를 이끌고 압록강을건너서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명이상을 치료하였습니다
백정전도의 개척자 무어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 이자 '백정 해방 운동의 조력자'로 칭해지는 인물입니다. 무어는 미국 매코믹신학교 재학중 언더우드로 부터 한국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졸업후 32세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 왔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방전도로 사람들을 모아서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열었습니다. 학생들중에 관자골에 사는 백정 박씨의아들 ‘봉출’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봉출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들은 무어는 박씨를 여러 차례 위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무어가 외국인 한 사람을 박씨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바로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 이었습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 스럽게 치료해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습니다. 박씨는 왕의 주치의가 짐승같은 백정을 치료해 준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출석하였고,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897년 44세때 한국에 들어와서 ‘배화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27세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캠벨은 곧 두 자녀도 병으로 잃었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녀는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 간호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후 33세 되던해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배화학당설립과 배화학당내 최초의 교회당 캠벨은 1897년 10월에 남감리회의 첫 번째 여성 선교사로서 중국인 양녀와 함께 한국에 들어옵니다. 1898년10월2일, 그녀는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에 여성들 대상의 학당을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내는 배움의터전’ 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폐 결핵 퇴치를 위해 힘쓰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부인 메리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동안 의료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폐 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셔우드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 폐 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헤론이야기-조선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섬기다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입니다. 헤론은 테네시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받은 수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재로서 보장된 길을 선택하지않고, 헤티와 결혼한후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 6월 21일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입국한 후에는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일했습니다. 20대 후반의 열정에 넘친 세 신참선교사들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서로 간에 많은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에비슨은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고 성장시켜서 근대 의학의 발전에 크게공헌 하였습니다.그는 캐나다 시골의 궁핍한 영국 이민자 가정출신으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약대와 토론토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외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토론토 시내에 개업해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에비슨은 조선에서 선교사로활동하던 언더우드를 토론토로 초청하여 교회와 학교에서 강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언더우드는 ‘조선에 선교사로 오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였고, 이미 선교사로 헌신하길 결심하였던 에비슨 부부는 자신들의 사역지가 조선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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