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단과 곤당골교회 이야기
글 : 오소운 목사
연암 박지원은 사신으로 명나라를 왕래하는 도중 옥갑(玉匣)이란 곳에서, 중국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여러 가지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듣고, 그 내용을 추려서 자기의 저서《열하일기》가운데「옥갑야화(玉匣夜話)」란 제목을 달고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서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하련다.
홍순언은 16세기 후반기부터 17세기 초에 활동한 조선의 이름난 역관이다. 선조 때 조선사신을 따라 여러 번 중국 명나라를 왕래하였다.
한번은 홍순언이 북경에 가서 기생집을 찾아갔다. 기생 가운데 하루 밤에 화대가 1천 냥인 여자가 있었다. 홍순언은 호기심이 부쩍 동해 그를 불렀다. 이팔 어린 소녀로서 외모로 보나 자태로 보나 이런데 나올 여자아이 같아 보이지 않았다.
홍순원은 천 냥이나 되는 거금을 건 연유를 물었다.
"제가 많은 값을 요구한 까닭은, 세상의 한량들 중 천 냥이라는 많은 돈을 화대로 선뜻 내어놓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들 하기에, 하루 이틀 미루어서 잠시 욕을 면하기를 바라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천하의 의기 있는 분이 제 몸값을 치르고 데려다가 처첩을 삼아 주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청루에 들어온 지 닷새가 되도록 감히 천금을 내어놓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다행히 손님과 같은 천하의 의기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나리께선 외국 분이시라, 국법 때문에 저를 데리고 귀국하실 수 없을 것이고, 이 몸은 한 번 나리를 모신 다음에는 다시 더럽힐 수 없습니다."
홍순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청루에 들어온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남경(南京) 호부시랑(戶部侍郞) 아무개의 딸입니다. 아버지가 모함을 받아 집이 적몰(籍沒) 당하고 또 추징금을 바쳐야 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몸을 청루에 팔아 아버지의 죽음을 구했습니다."
홍순언을 여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낭자의 부친이 지금은 비록 죄를 지어 하옥되어 있지만 머지않아 풀려날 것이다. 게다가 이 여인의 언행을 보니 장차 귀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어찌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 낭자를 더럽히겠는가?’
“낭자의 효심이 지극하오. 내 오늘 당장에서 낭자를 속량해주겠소. 몸값이 얼마인가?” “2천 냥입니다.”
홍순언은 인삼을 판돈과 청나라 비단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돈을 모두 털어서 낭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일어섰다. 여인은 수없이 절을 하고 은부(恩父)라 불렀다. 그리고 서로 헤어졌다.
홍순언은 낭자에게 준 은자 2천 냥 때문에 상단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천 냥 중에는 상인들이 맡긴 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홍순언은 더욱 열심히 장사를 하여 상인들의 돈을 다 갚았다. 그 후 홍순언은 이 일을 다시 염두에 두지 않고 다 잊어버렸다.
홍순언은 그 후 또 다시 명나라에 갈 일이 생겼다. 그가 명나라 땅에 들어서자 연도에서는 자주 “이번에 홍순언이 오느냐” 고 묻는 것이었다. 순언은 그저 이상하게만 생각하였다. 홍순언 일행이 북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길옆에 성대하게 장막을 치고 지키고 있던 한 병사가 나와 말하였다.
"홍순언 대인이십니까? 저는 병부상서(兵部尙書, 국방장관 격) 석노야(石老爺)께서 대인을 맞아오라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석상서의 집으로 안내는 것이었다. 그의 집에 이르자 석상서가 나와 순언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은장(恩丈)어른 어서 오십시오, 따님이 아버님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순언을 안내하여 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상서의 부인이 성장을 하고 마루 아래로 내려가 공손히 절을 하는 게 아닌가.
홍순언이 송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석 상서가 웃으면서 말했다.
"장인께서는 따님을 잊으셨습니까?"
순언은 그제야 상서 부인이 전날 청루에서 몸값을 갚아 준 바로 그 여인임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청루에서 나오자 곧 아내를 사별한 석성(石星)의 후취(後娶)가 되었고, 석성이 병부상서가 되자 그녀도 따라서 귀부인(貴夫人)의 지위에 올랐는데, 늘 손수 보은(報恩)이란 글자를 수놓아가며 비단을 짜 왔다고 한다.
홍순언이 귀국하게 되자, 병부상서 내외는「보은단(報恩緞)」과 함께 다른 값비싼 비단이며 금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 주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까지 왜병에게 짓밟힌 조선 정부는, 선조 왕을 모시고 압록강변 신의주에까지 후퇴를 하였다.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선조는 명나라의 구원 요청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홍순언은 다시 역관의 자격으로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갔다.
홍순언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왔다고 전하자, 보은단의 병부상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선에 5만 명의 구원병을 보내게 해주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온 5만 명의 구원병의 도움을 받아 평양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에도 홍순언은 병부상서 내외로부터 많은 재물을 받고 귀국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홍순언은 임진왜란 때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역관들 중에 가장 많은 야사가 남아 있으며, 현재에도 역관을 넘어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곤당골교회 ➡ 중앙교회 ➡ 승동교회
홍순언의 이 이야기기가 퍼져 나가자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네를「보은단골」이라고 불렀다. 이게 세월 따라 와전되어「본당골」「곤당골」이 되었다. 이 곤당골에 백정들이 모이는 교회가 생겼는데, 우리교회 옆의 승동교회가 바로 그 교회다. 그 역사를 보자.
무어 선교사
무어 선교사의 선교열정은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한 예로, 무어 선교사는 한글 공부에 열의를 보였는데,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 조그만 집을 얻어 살았다.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주던 식모에게 전도하였고, 조선에 도착 후 6개월 만에 한국어로 능숙하게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서울 거리를 다니며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한강까지 걸어가 강 주변에 모여 있는 마을까지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무어 선교사의 시선은 소외된 계층에 멈추었다. 그 중에서도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일대)에 사는 백정(白丁)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계층은 양반, 중인, 상인, 천인 4가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정의 신분은 가축(소와 돼지, 닭)을 도살하는 일을 전담하는,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이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소외된 계층이었다. 백정은 결혼할 때도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죽어서도 지게에 실려져 조용히 장사를 지내야 했던 신분이다.
무어 선교사는 백정들이야말로 가장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893년 6월, 백정들이 모여 사는 곤당골에 16명의 교인들과 함께 새문안교회에 이어 장로교회로서는 두 번째 교회인「곤당골교회」를 설립하였다. 곤당골교회는 백정들에게 있어서 사람대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백정들은 교회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무어 선교사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조금씩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곤당골교회의 평안과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곤당골교회는 무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양반 계층 성도들도 있었다. 이 양반들이 교회에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출석하자 같이 예배드리는 것을 거부하고 이렇게 간청하였다.
“백정들은 뒤에서 예배드리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며 양반들의 항의를 물리쳤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반과 천민은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에 양반들은 곤당골교회를 떠나 홍문동(현재 광교 지역)에 ‘홍문섯골교회’를 설립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무어 선교사는 양반과 상놈 이 두 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집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임의 뜻인가… 1898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곤당골교회를 삽시간에 삼켜버렸다. 교회를 잃은 성도(백정들)은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다시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은 이 기회에 양반과 백정이 한 장소, 한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래서 양반들이 옮겨간 홍문섯골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이 구별 없이 한데 어울려 예배를 드리며 교회 이름도「중앙교회」로 바꾸었다. 교회가 더 부흥하자 1905년 8월 현 인사동 137번지로 옮기면서 제2대 담임목사로 곽안련 목사(Rev. Charles Allen Clark)가 시무하게 되었는데, 그 해에 당대 한국 최고의 부흥사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모셔다가 부흥회를 하였다. 이 때 된 일을 길선주 목사의 아들 길진경(吉鎭京) 목사가 쓴《길선주, 부흥의 새벽을 열다》(두란노, 2007) 156쪽에서 인용한다.
길선주 목사와 함께 졸업한 평양신학교 1기생들 ; 왼쪽에서 세번째가 길선주 목사
“서울 집회는 종앙교회에서 열렸는데, 성령의 강한 불이 몰아쳐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길선주는 중앙교회가 ‘그리스도가 승리한 복음의 등대’ 라면서, 그 이름을 이길 승(勝) 자를 넣어「승동교회(勝洞敎會)」라고 바꾸어 주었다.”
이 말 그대로 승동교회는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던 조선의 악습인 신분계층을 무너뜨리는 데 승리하여 만민평등 사상을 고취하는데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주1> 현재 승동교회는 서울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승동교회 건물은 100여년의 한국 교회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를 모두 가지고 있는 한국 역사의 보고로서, 무어 선교사의 사명과 열정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주2>
무어 선교사는 꾸준한 노방전도로 사람들을 모아서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열었습니다. 학생들 중에 관자골에 사는 백정 박씨의 아들 ‘봉주리 (Pong Choolie)’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주리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어 선교사는 박씨를 여러 차례 위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무어가 외국인 한 사람을 박씨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바로 고종 황제의 주치의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였습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습니다. 박씨는 왕의 주치의가 짐승 같은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고,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백정의 아들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가 된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영접한 <믿음> 때문에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확 달라집니다. 당신도 어서 예수를 믿으십시오.
고종황제의 주치의, 세브란스병원 창설자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
당시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졸랐습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습니다. 한편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3년 후인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는 분리되었던 홍문동 교회와 다시 합하여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 드리는 중앙교회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백정교회로 불렀습니다. 이후 중앙교회는 1905년 8월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교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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