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종교통합]
[타종교에 대한 가톨릭의 노선은 바티칸 II 공회에 의해 수정되었다. 다음은 타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가톨릭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문서 내용이다. 가톨릭 신부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 싣는다. [참고로, 괄호 안은 내가 추가한 것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Nostra aetate]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주교 바오로는 성스러운 공의회의 교부들과 더불어 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타 종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선언하는 바이다.
1. 인류가 날로 더욱 긴밀히 결합되고 여러 민족들 사이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어 가는 현대에 있어서 교회는 비그리스도교적 타 종교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바이다.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사이의 일치와 사랑을 도모해야 할 사명감을 느끼며 교회는 여기서 특히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 즉 모든 사람을 공동목적으로 이끌어 주는 것들을 포함한다.
사실, 여러 민족들은 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전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시었으니(사도17,26참조) 모든 민족들은 단 하나의 기원을 가졌고 또한 단 하나의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와 착하심의 증거와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이고(지서8,1;사도14,17;로마2,6-7;1디모2,4참조)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천상 성도에서 간선자들이 다시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여러 민족들이 하느님의 빛 속에 거닐겠기 때문이다.(묵시21,23이하 참조)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인생의 숨은 수수께끼들의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후의 심판과 판결은 어떨 것인가? 마침내 우리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
2. 고금을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는 사물의 변화와 인생의 역사 속에 현존하는 심오한 힘을 어느 정도 느껴 왔다. 때로는 최고의 신이나 아버지를 긍정하였다. 이같은 느낌과 긍정은 그들의 생활에 종교적 깊은 뜻을 부여한다.
종교라는 것은 관련문화의 발전을 따라 세밀한 개념과 세련된 어법으로 인생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애쓴다.
예컨대 힌두교에 있어서 사람들은 신의 비밀을 탐구하여 한없이 풍부한 신화와 깊은 철학의 시도로써 표현되는 동시에 인생고에서의 해탈을 찾아 수덕생활이나 깊은 관상이나 신뢰와 사랑으로 신에게로 도피하고 있다. 또 불교에 있어서는 여러 학파에 따라 무상한 현세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열심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해탈 상태에 이르든지 혹은 자신의 노력이나 위로부터의 도움에 의하여 최고 조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에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규범과 성스러운 예식 등을 가르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제시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따르는 각주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수세기 동안 선교사들은 비 그리스도교가 그저 사탄의 작업에 불과하며 선교자의 임무는 오류에서 진리의 지식으로 회심시키는 것이라고 종종 결론지었다. 이제 이 선언은 접근방식에 있어서 당국의 변화를 표시한다." 즉 선교자의 임무는, 공식적으로, 더 이상 타 종교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14,6)그분 안에서 사람들이 종교 생활의 풍족함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과 화해시키셨음을(2고린5,18-19)교회는 선포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3. 교회는 또한 회교도들도 존경하고 있다. 생명의 실존자, 자비롭고 전능한 천지의 창조주(성 그레고리오 7세의 편지 21, 마우리따니아의 왕 안시르에게 보낸 편지, 라틴 교부 제 148권, 450면 이하 참조) 사람들과 얘기하시는 유일신을 그들도 흠숭하며 아브라하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은 그들 신의 비밀한 결정에도 순종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를 하느님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예언자로는 공경한다. 동정 성모를 공경하며 때로는 그의 도움을 정성되이 청하기도 한다. 또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고 갚아 주실 심판 날을 기다린다. 여기서 그들은 윤리 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로써, 또는 애긍시사와 재계로써 하느님을 섬긴다.
역사 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회교도들 사이에 불목과 원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교회회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바이니, 과거를 잊어버리고 서로 이해해 주기를 진실로 힘쓰며 모든 이에게 사회정의와 윤리선과 나아가서는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옹호해 주고 촉진시켜 주기를 바란다.
4. 이 성스러운 교회회의는 교회의 신비를 탐구함에 있어서 신약의 백성과 아브라함의 혈통을 맺어 주는 인연을 기억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과 불리움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세 계획대로 이미 성조들과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한다.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갈라3,7참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부르심을 받았고, 선민이 종살이 땅에서 탈출한 역사적 사실은 교회의 구원을 신비롭게 표상하는 것이라고 공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옛계약을 맺으신 그 백성을 통하여 교회가 구약의 계시를 이어 받았고 이방인들의 야생 올리브 가지가 접목된 좋은 올리브 뿌리에서 교회가 자라고 있음을 잊을 수는 없다.(로마11,17-24)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화목시키고 당신 안에서 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음을 교회는 믿고 있다.(에페2,14-16참조)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로마9,4-5)하신 사도 바오로의 혈친에 관한 말씀도 교회는 언제나 되새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초석이요 기둥인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한 초기 제자들 대부분이 유대 백성 중에서 태어났음을 잊지 않고 있다.
성경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자기를 찾아 주시는 때를 알지 못하였고(루가19,44참조) 대부분이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복음의 전파를 받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로마11,28참조) 그렇지만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회심없이 받았으나 조상들 때문에 그들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로마11,28-29;교회헌장n.9참조) 교회는 예언자들과 사도 성 바오로와 함께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만백성이 한 소리로 주를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느님을 섬기리라"(소포3,9;이사66,23;시편 65,4;로마11,1-32참조)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유대인들의 정신적 공동 유산이 이렇듯 큰 것이므로 이 성스러운 교회회의는 서로의 이해와 서로의 존경을 증진시키며 권장하는 바이다. 특히 성경과 신학의 연구와 형제적 대화에서 이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유대인들의 집권층과 그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요하였지만(요한19,6) 그리스도 수난하실 때에 저질러진 범죄를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차별없이 책임지우거나 더구나 오늘의 유대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경상의 귀결인 듯이 유대인들을 하느님한테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 복음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칠까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누구를 박해하든지간에 박해라면 무엇이나 다 교회가 배격한다. 교회는 유대인들과의 공동 유산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이요 복음적인 사랑에서 유대인들에게 대한 온갖 미움과 박해와 데모 같은 것을 언제 누가 감행하였든지 간에 차별없이 통탄하는 바이다.
교회가 언제나 주장하였고 또 현재에도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서 모든 사람들의 죄 때문에 자원으로 수난하시고 죽으시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표시와 온갖 은총의 원천으로 선포하는 그것이다.
5.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감히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이웃 형제들을 대하는 인간의 대토는 이처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 성경이 말해 주듯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은 알지 못합니다."(1요한4,8)
여기서 마침내, 인권과 거기서 귀결되는 권리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의 차별을 주장하는 온갖 이론과 실행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차별과,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써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아 배격하는 바이다. 따라서 성스러운 교회회의는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훈을 따라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1베드2,12)할 수만 있다면 각자의 능력대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여(로마12,18참조)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도록 간절히 비는 바이다.(마태5,45)
이 선언문에서 말한 각 조항과 전체에 성스러운 공의회의 교부들이 찬동하였다. 우리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된 사도적 권한으로, 존경하올 교부들과 더불어 이를 성령 안에서 인준하고 결정하고 제정하여, 공의회에서 결정한 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반포하기를 명하는 바이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1965년 10월 28일 가톨릭 교회 주교 바오로 자서 (교부들의 서명이 따른다)
[참고로, 바티칸 II 공회를 개최한 교황 요한 23세와 바울 6세는 달라이 라마, 회교도인 안와르 엘 사닷, 불교도인 우 탄트 UN 사무총장 등과 함께 종교 유엔으로 알려진 "이해의 사원 (TEMPLE of A Understanding)<<"이라는 것을 창설했다.] 비그리스도교에관한선언이 포스트를..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Being Renewed 가톨릭의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Being Renewed 가톨릭의 "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트랜스포메이션(변혁, transformation)"은 무엇인가? 에큐메니칼/종교통합 2009/02/20 01:03
http://blog.naver.com/yoochinw/130042960449 이 포스트를 보낸곳 ()
"트랜스포메이션(변혁, transformation)"은 무엇인가?
- 린 레슬리 / 사라 레슬리 (Lynn & Sarah Leslie)
크리스천들이 "트랜스포메이션(변혁/변화, transformation)"이라는 낱말이 입에 오르내릴 때, 그들은 이것이 성경적 단어라고 여긴다. 이는 이 단어가 로마서 12:2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be transformed)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600년대로부터의 매튜 풀의 주석은 이렇게 타이른다: "거듭 나고, 너희 사람 전체가 바뀌어라;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마음을 통해서 혼의 하위기능 위로 성령께서는 일하신다." 매튜 헨리 주석은 "죄로부터 점점 더 죽고, 점점 의를 향해 사는 성화의 진행"으로 해석한다. 성경적 "트랜스포메이션"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메타모푸(metamorphoo)이며, 이로부터 변형(변태, metamorphosis)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즉, 애벌레가 나비로 바뀌는 것 같은 완전한 변화를 말한다. 성경적 트랜스포메이션이란, 따라서, 각 신자의 성화에 적용된다.
KJV(킹제임스역) 영어성경에 트랜스폼(transform)으로 번역된 그리스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이 단어는 메타스키마티조(metaschematizo)라는 것으로, 이것의 어원으로 '패션(fashion)'을 뜻하는 '스키마(schema)'를 가지며, 이로부터 영어 단어 '계획/음모(scheme)'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고린도후서 11:13-15는 이 경고를 주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transforming)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transformed)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뉴에이지 신지학자(神智學者)들은 1980년대 초반에 "트랜스포메이션"이란 단어를 새로운 의미로서 현대 어휘에 등장시켰다. 루시퍼리안(Luciferian, 사탄주의) 신지학회회원들을 위한 "커밍아웃파티"를 일으킨 작가 메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은 이 용어를 널리 사용했다. 그녀는 이것을 "의식의 변혁(트랜스포메이션)", "새로운 선견(先見)", "지각(知覺)의 진화", 그리고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정의한다. 트랜스포메이션은 "개인적 진화"에서 "집단적 진화"로의 테야르(테야르 드 샤르댕<<) 도약(Teilhardian leap)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크리스천 분별연구가들과 작가 콘스탄스 컴비(Constance Cumbey)는, 퍼거슨 타입의 "트랜스포메이션"은 "마귀적 영향의 더 깊은 단계로 진행하는 것을 완곡하게 말한 것"이라고 담담히 논한다.
오늘날의 신복음주의 교회에서는 "트랜스포메이션"이란 용어가 현재 성행하고 있다. 다양한 교회들과 교단들은 "트랜스포메이션" 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트랜스포메이션"의 하나의 정의는 이렇다:
트랜스포메이션 -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이 인류 사회에 미치는 상당한 [성스러운/세속적인] 초자연적인 영향. 교회 안에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삶에서의 거룩함의 증가, 회심자 증가의 가속화, 관계에 있어서의 화해, 은사와 부르심의 동원, 보다 큰 사회와의 관련과 참여의 증가. 문화에 있어서 이것은 이런 특징을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 퍼짐, 사회 병적 현상의 급격한 교정, 범죄율의 균형잡힌 감소 (이사야 58장에 나온 진정한 성경적 정의(正義)의 증거), 지역사회 상업에 부어지는 초자연적 축복, 마음이 찢어진 (사이가 벌어지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치유, 하나님 나라의 의(義)의 수출. 이렇게 하기 위해서, 촉매역할을 하는 핵심 성도들은 으례 지속적인 회개와, 겸손, 기도와 희생적 섬김이의 삶의 양식을 받아 들이는데, 이런 삶의 양식은 하나님의 임재와 호의를 끌어 들이며, 인간 육체와 마귀의 통치권력구조의 지배적 영향력을 깨뜨린다.
만약에 트랜스포메이션의 이 새로운 정의가 복잡하고 애매하게 들린다면, 맞다. 당신이 이 새로운 복음주의 교리에 빠지지 않았다면, 이것은 잡동사니 같이 들릴 것이다. 독자들을 돕기 위해 여기 "트랜스포메이션"의 새 교리를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 있다.
1) "트랜스포메이션"이란 용어는 계획되고 의도된 "제2의 개혁"("신사도개혁"이라고도 불림)을 뜻한다.
2) 이 "트랜스포메이션"은 (로마서 12:2와 같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그룹과 실체들에 집단적으로 적용된다.
3) 이 "트랜스포메이션"은 지구적 규모로 정치사회문화적인 개혁을 일으키기 위한 "모든 것을 감수하는" "선교"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다.
4) 이 "트랜스포메이션"을 촉진하기 위해 극도로 정교한 심리사회적 마케팅 기법이 활용된다.
5) 최첨단 통계 계량 평가방법이, 미리 사람들이 설정한 판단기준들을 통해, 이 "트랜스포메이션"을 평가한다.
6) 새 이름, 새 기법, 새 방법론, 새 교리 등의 복잡한 영적 활동이 과도해져야, "트랜스포메이션"을 하늘에서 그리고 땅에서 일어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7) 다단계 마케팅과 과히 다르지 않은 교회 계층구조의 재조정이 "트랜스포메이션"이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8) 이 새로운 권위구조와 책임구조가 신자들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져야 한다고 한다.
9) 이 "트랜스포메이션"은 (변증적으로 말하자면) 점점 가속화되어 가는 지속적인 변화를 먹고 자란다.
10) 이 "트랜스포메이션"에 복종하고 참여하는 것이 대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1) 이 "트랜스포메이션"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완전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12) 따라서 신자들은 이런 여러 "트랜스포메이션"적 활동을 통해서 지구를 새롭게 만드는 공동창조자이며 공동구속(救贖)자이다.
명백하게도, 신복음주의적 "트랜스포메이션"의 교리는 신지학과 기독교를 통합(또는 맥락화)해서 잡종의 새로운 정설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 "트랜스포메이션"은 모든 새로운 형태의 에큐메니즘(종교통합주의)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되어서, 이교집단과 신비주의집단 모두와 공통의 장을 찾아 준다. 대중적인 신복음주의 리더인 레너드 스위트는 이 트렌스포메이션(transformational) 에큐메니즘의 폭넓은 개념을 그의 1991년도 "퀀텀(양자/量子)영성: 포스트모던 변론(Quantum Spirituality: A Postmodern Apologetic)<<"이라는 책에서 펼쳤다:
다른 이들과 "연결되는" 복음전도의 세계화와 세계적으로 "알려진" 복음은, 힌두교도, 불교도, 시크교도, 이슬람교도들과--[다른, 소위 (우리에게만) "새로운",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온 사람들과]--어느 것이 우월하고 강한 것인 지에 대한 억측 없이, 담장을 넘어 대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크리스천들이. 다른 이들의 신앙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가 깊게 들어가면 결국 같은 것을 믿는다"는 그들의 믿음 안에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것을 오해 없이 보고 찬미할 수 있는 자치독립된 신학을 가져야 한다. [레너드 스위트<<는 위의 책에서 "하나님은 온세상(우주)의 영이며 우주의 깨달음, 즉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정보, 우주의 사고이다"라고 주장한다/역자]
** 원문: http://www.discernment-ministries.org/NLSeptOct_20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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