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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방언에 관한 성경적 고찰 :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한주랑 2013. 6. 7. 07:57

방언에 관하여 2 - 방언에 관한 성경적 고찰 : 고린도전서 14장에서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5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앞 글에서 방언에 관하여 논의를 시작했지만, 어쨌건 가장 중요하게 해결을 해야 할 부분은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이 성경 전체에서 방언에 관하여 가장 많은 분량을 다루고 있고, 실제로 방언에 관한 대다수의 논의가 이 장을 통하여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방언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여기에서 다룰 내용의 제목을 먼저 말하고 시작한다면 “방언은 말씀 은사이다”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한다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것을 “기도”로 합니다. 개인적으로 은밀히 하나님과 만나는 도구로서 방언을 사용합니다(물론, 제가 아는 대부분의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것을 은밀히 하기보다 교회 전체가 함께 있는 기도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들리도록 기도함으로 자신의 영적인 부분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은 “기도”라기보다는 “말씀은사”의 한 방편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짚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글에서 말씀드렸던 옥성호 씨의 책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 부분이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방언을 논증할 때 제일 중요한 부분은 바로 방언이 “예언, 즉 설교”의 한 방편이라는 점입니다.

 

1. 고린도전서 14장 자체가 “예언은사”과 “방언은사”의 비교를 목적으로 씌어져 있다.

 

일단 우리가 성경을 펼쳐서 보면 알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가 애초에 예언은사와 방언은사의 비교를 목적으로 씌어졌다는 점입니다. 두 은사는 유사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 은사를 비교하면서 고린도교회에 “방언은사보다 예언은사가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이 더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간단하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예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바울은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19절)고 말합니다.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이 글 바로 뒤에 예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따로 글을 하나 더 썼습니다(82번 글,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 글을 먼저 숙독하시기를 권합니다. 내용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설교에 해당하고 방언이 기도에 해당한다면, 둘을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설교와 기도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이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 이유는 둘 다 말씀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간단하게 우리는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 말씀은사의 차원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말해둘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후 더 확실한 증거들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왜 방언이 말씀은사인지 다음의 내용들을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2. 영으로 비밀을 말함

 

2절에는 방언을 정의하는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입니다.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신약성경에서 “비밀”이라는 표현은 항상!(항상입니다) 예외 없이 “계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평생을 성령론을 연구하면서 보수신학의 입장에서 오순절 주의자들과 싸워온 리차드 개핀 박사는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합니다. 개핀이 강조하는 비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서신의 다른 부분에서 ”비밀“은 계시의 핵심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주권적, 일반적으로 펴보이시지 아니하면 사람에게 숨겨져 있어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비밀’의 내용은 신비하고 진기한 비법이나 진리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종말론적 구원이다. ‘비밀’이란 말은 구원을 포괄적으로 가리키기도 하고(롬16:25; 엡1:9; 3:3이하; 6:19; 골1:26-27; 2:2; 4:3), 구원과 관계된 구체적인 측면을 가리키리도 한다. 이 비밀은 사도들의 전파를 통해서 열방에게 알려지고 계시된 비밀이며(롬16:25; 엡3:9; 골1:25-26), ‘복음의 비밀’(엡6:19), ‘그리스도의 비밀’(골4:3)로서 모든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3:2의 비밀은 전에는 숨겨졌으나 이제 비로소 알려진 특수계시를 가리키는 것이다.”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74)

 

신약성경에서 “비밀”이라는 말은 항상 “계시의 구속사적 내용” 즉,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여러 구절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을 뽑아 말씀드리면 이러한 것들입니다.

 

골1: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엡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2:2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계5:4-6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2절은 방언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방언은 “영으로 비밀(즉 그리스도의 구속 계시)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이 정의가 오늘날의 개인 방언기도에 적용될 수 있습니까? 방언은 혼자서 이상한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예언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속계시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2절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다

 

또한 5절에서도 이 사실은 확인됩니다. 5절 역시 계속해서 방언을 예언과 비교하는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보다 못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는 앞에서 말했듯이.....방언을 예언과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방언이 기도이고, 예언이 설교이면 둘을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둘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것인데, 방언보다 예언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방언을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보다 못하다”는 말은 거꾸로 하면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다” 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의 위상은 분명히 예언보다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14장 5절은 우리에게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은 것”임을 또한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통역된 방언이 예언과 같다는 것은 방언하는 사람이 말을 했을 때 그것을 풀이해 놓으면 설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개인 방언기도가 될 수 있습니까?

 

여기서도 역시 방언의 성격은 예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철저하게 예언과 같은 입장에서의 계시은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4. 방언을 직접적으로 “계시”라고 표현함

 

그 다음은 살펴볼 구절은 30절입니다. 30절은 방언을 직접적으로 계시라고 표현합니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27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이 부분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어떤 이가 방언을 시작할 때에 대해 쓴 것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27절). 30절의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이라는 말은 27절부터 시작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의 설명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방언을 무엇이라고 표현하였습니까? 방언을 “계시”라고 표현합니다. 계시는 다들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직접적으로 “계시”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방언은 계시은사인 예언, 즉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입니다.

 

더 나아가 27절부터 33절의 말씀에는 방언과 예언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옵니다. 마치 같은 현상을 다른 두 단어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27절에서는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이라고 합니다. 누가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29절에는 보면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라고 합니다. 금방 방언으로 말하거든...이라고 했던 것을 “예언하는 자는”이라고 받았습니다. 30절에는 이것을 “계시”라고 표현했습니다. 31,32절은 다시 이것을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31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32절)

 

즉,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 “예언”, “계시”는 모두 다 같은 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 26절 이하는 예배시의 계시전달 상황

 

그런데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과 같습니까? 오늘날 방언은 개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 모습은 개인이 기도를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상황입니다. 26절은 직접적으로 이것이 예배임을 암시하는 구절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26절은 “너희가 모일 때에”라고 하고 있고, 예배 안의 요소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그것입니다.

 

27절부터 나타나는 이 모임의 상황을 간단히 재연하면 이렇습니다. 은 회중들이 둘러앉아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 중의 누군가에게 계시가 임했을 때, 그 사람이 일어서서 그 계시를 방언으로 말합니다(27절.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그런데 방언이 임하게 되면, 이것을 중구남방으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고,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서 해야 합니다(27절). 그나마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합니다(28절). 나머지는 이 말씀을 듣습니다(29절). 또한 30절에 보면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해야” 합니다. 이를 31절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33절)입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언”과 어느 부분에 닮은 곳이 있습니까? 이 모습은 사람들이 공적으로 모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 회중들에게 선포하는 모습입니다. 지금은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모습이 없어졌지만, 성경이(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초대교회 시대에는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계시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임하고 있던 계시”가 공존하던 시대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후반부에 나오는 이런 모습은 철저하게 공적 예배 안에서 행해지던 설교의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철저하게 예언과 같은 맥락의 계시은사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방언을 기도라고 표현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14절). 하지만 앞의 설명을 모두 이해했다면, 우리는 14절 한 절의 말씀에 나타나는 “기도”라는 것의 의미가 “계시은사의 확장으로서의 기도”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이 “기도”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14장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확실한 증거들을 무시해야 하겠습니까? 분명히 14절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나오지만, 이것은 “계시은사로 있었던 방언이 기도의 측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우리는 초대교회의 기도가 우리들의 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와 몹시 다른, 그리스도의 구속을 노래하는 기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계시는 기도에도 ‘확장’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으로 이해해야지, 이 말 한마디 때문에 방언이 예언과 같은 급에서의 계시은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연구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주위에서 보는 방언과 성경의 방언은 “전혀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남발되고 있는 이 방언들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 - 정말 예언을 하라구?

 

14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예언”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은 노스트라다무스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많은 예언을 남겼고, 또 (해석이 분분하긴 하지만) 많이 적중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소위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911사태를 맞췄다는 이야기나 미국에서 부시가 정권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적중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듣게 됩니다.

 

그럼 성경은 어떨까요? 성경은 “가장 뛰어난 예언서”일까요? 가끔씩 TV에서 다큐멘터리 등에서 나름대로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다는 사람들이 나와서 성경에 무슨 무슨 예언들이 나타나 있고, 그것이 종말론을 구성한다느니, 마지막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관하여 성경에 비밀이 적혀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정상적으로 읽지 않고 가로나 세로, 대각선 등으로 단어배열을 다르게 읽어서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바이블 코드”라는 것도 한때 큰 유행이 있었습니다. 과연 성경은 앞날을 예언해 놓은 예언서 중의 한권일까요?

 

거기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우리는 예언을 하려고 해야 합니까?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 중에는 이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분도 계셨습니다. 우리가 은사를 많이 구해야 하지만, 특별히 “예언하는 은사”를 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은사를 받으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맞힐 수 있는 신령한 힘을 갖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저를 가르친 전도사님 중에 자기가 기도해서 실종된 사람의 사체를 찾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기도하는데 자꾸 “옥상 물탱크로 올라가 보라”는 메시지가 떠올라서 실제 가서 보았더니 거기에 시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예언”을 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은사주의가 갈수록 만연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구절을 정확하게 해석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이번 여름에 물가에 가면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오!” 따위의 이야기를 교회에서 듣게 될 것입니다. 설령 이것은 좀 과장이라 할지라도 많은 청년들이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며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벌써 이런 경향이 한국교회 안에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사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젊은 청년들 중에서는 실제로 이 구절을 사모하면서 예언의 은사 받기를 갈구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내용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라” 따위는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소립니까 목사님? 성경에 예언하는 것을 사모하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렇게 따져 묻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잘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어, 한국교회는 전체가 다 무지의 늪에 빠져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좀 더 신비주의적인 면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예언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크게 문제화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에 전방위적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한국교회는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우선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성경은 복술을 금하고 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에는 예언이 자주 나타나며, 예언이라는 단어도 자주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예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언은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프로페튜오”는 “앞날을 내다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포하다”, “신탁을 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예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로서는 “대언”의 의미입니다.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예언”이라는 말의 의미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함.

2) <기독교>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또는 그런 말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듯이 성경의 예언은 후자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리 무언가를 짐작하여 말함”의 의미로서의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본래의 의미가 더 중요하겠죠? 예언 즉, “프로페튜오”가 사용된 용례를 성경 안에서 설명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바우어 사전 참조).

1) 전달된 계시를 말하다, 메시지를 선포하다 (고전11:4;13:9;14:1,4이하;13:39)

2) 가르치다, 권고하다, 위로하다 (고전14:3,31;계11:3;11:10;고전14:24)

3)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마7:22;행21:9)

 

“프로페튜오”는 우선적으로 언제나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관한 것일 때는 예언이 미래를 포함합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에는 미래를 예견하는 것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언의 의미인 것은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전언, 즉 전달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서도 역시 이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은 “앞날을 내다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설교”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서도 예언의 의미는 거의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선지자를 “나비”, 그리고 예언하다는 말을 이 선지자의 명사에서 파생된 동사로 “나바”를 쓰는데, 이 말의 뜻도 이렇습니다. 사전으로부터 직접 옮겨온 내용입니다.

 

“선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나비는 일반적으로 '부르다 call', '선포하다 proclaim'라는 뜻의 아카드 동사 나부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과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어원을 헬라어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하였고, 이 단어를 능동태형, 즉 부르는 자, 예언하는 자, 설교자로 이해하였다(참조: H. J. Kraus, Worship in Isrel, 1966, 102) 그러나 올브라이트는 그러므로 이 ‘나비’라는 단어를 수동태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의미는 “부름받은 자”, “임명받은 자”를 의미한다((W. F.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1940] 1957, 303)“.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구약성경에서도 “예언하다”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수적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는 한다 할지라도 전혀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이 단어의 본의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언한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는 말씀을 대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전혀 다르게 점을 치거나, 복술을 행하거나 하는 등의 일은 이스라엘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잘못 이해한 예언”은 성경이 엄히 금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신명기 18장은 “참 선지자”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신18:11-14)

 

하나님께서는 앞날을 내다보거나, 길흉을 말하는 자들을 “가증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져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버젓이 기도원 등에서 이런 일들이 행해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소위 “신령한”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자들이 이런 일들을 자행합니다. 이것은 복술자들, 무당들에 해당하지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가혹합니다.

출22:1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지니라”

신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성경이 우리에게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을 하라고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을 근거로 하여 앞날을 내다보는 복술행위들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우리에게 소위 신령하다는 사람들이 행하는 거짓 영적 행위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히려 훨씬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 윤석준 목사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www.lovereformed.com)

출처 : (안산) 회복의교회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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