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방언은 천상의 언어인가, 외국어인가?
방언에 관하여 1 - 방언은 천상의 언어인가, 외국어인가?
행2:8-9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한국교회가 가진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는 성도의 생활이나 신앙에 관련된 내용을 “신학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역사상의 기독교회들은 항상 교회 안에 이슈가 되는 문제를 만났을 때, 신학자들,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대교회들은 교회 안에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 삼위일체론 등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 교회회의로 모여 신학토론을 통하여 “올바른 성경적 답”을 도출해 내고, 그것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천막부흥집회의 영향력 하에 태어난 교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애초에 “어느 것이 성경적인지”에 관한 관심 자체가 매우 적습니다. 한국교회에 실용주의가 판을 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도 사실 성도나 교회의 어떤 행동들에 대해 “이것이 성경적이냐”를 묻지 않는 풍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성경말씀의 원리라기보다는 “목사의 목회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되게 됩니다. 이런 풍토는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어봅시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가 찬양집회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내린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 예배”에 부합하는 것인지, 한번이라도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예배 시간 전에 3-40분 정도를 가스펠을 부르는 것이 현재의 한국교회에서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적 예배”에 맞는 것인지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논의해야 할 이슈조차 된 적이 있습니까?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냥 받아들여 사용하고 효과가 있으면 OK 입니다. 뒤늦게서야 부랴부랴 성경적 토론을 해보자고 말을 한들, 이미 다 하고 있는데 무얼 토론을 한단 말입니까?
최근에 은사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교회들마다 알파코스니 해서 이빨이 금이빨로 변한다고 여기저기서 문제가 많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결하거나 바로 잡으려고 노회나 총회에서 모여 보니,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결정을 내려 봤자, 그 노회나 총회 안에 이미 열렬하게 그것들을 하는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이 위원으로 앉아 있습니다. 신학적 논의를 늦게서야 해 봤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다 하고 있는 것을 논의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실용적 목회 방침으로 효과가 있으면 제각각 다 하고 봅니다. 거기다 대 놓고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논의해 봅시다”라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방언 문제가 많이 대두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이 방언에 관하여 신학적 진공상태에 있습니다. 전혀 다른 이론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무엇이 답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가운데, 실제로는 대다수의 교회의 성도들이 “오순절 주의” 계통의 성령론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 가운데 방언 하는 사람 주변에 두 세명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어떤지 논의가 없습니다. 그냥 일단 하는 것은 하는 것이고, 성경은 모르겠다...뭐 이런 식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이니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방언에 관하여 최근 ‘부흥과 개혁사’에서 평신도(“평신도”라는 표현은 종교개혁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만 편의상 이렇게 표기하겠습니다)에 의해 방언에 관한 책이 집필되었습니다(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부흥과 개혁사).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은사운동이 이렇게나 크나큰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다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제대로 된 방언에 대한 지침서나 교과서 하나 없이 이제껏 있다가, 평신도로부터 방언에 관한 정리된 책이 나왔다는 것은 모두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 본 이 책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성경말씀에 대한 주체적인 주해가 어려운, 신학을 하지 않은 입장에서 외국의 건전한 저자들의 주장을 읽고 정리한 것이 되다보니, 확고하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부족하다는 인상이 많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이 성경말씀에 일차적으로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타 저자들의 이차적 인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으나마 이 책의 이 장을 빌려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을 짚고 넘어가 보려고 합니다. 방언에 관하여는 두 편의 글로써 다룹니다.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기한 언어인가, 외국어인가?”의 문제입니다.
방언에 관하여 제일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가 이 방언이라는 것이 외국어인가 아닌가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방언 중에 외국어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방언을 한다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는데, 어느 날 외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누가 그렇다더라”는 카더라 통신 말고, 실제로 외국어를 배우지 않고 외국어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현재로는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따라서 방언이 “외국어다”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이상한 소리로 하는 방언이라는 것들은 성경적 설득력을 잃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중요한 것입니다.
원래 “방언”이라는 말은 우리말 뜻으로도, “어떤 지역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경상도 방언”, “전라도 방언”이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방언이란 “사투리”라는 뜻입니다. 곧 그 지역의 말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 말을 한글로 잘 번역했습니다. “기묘한 하늘의 언어”라는 뜻으로 어떤 단어를 조어(造語)하지 않고, 그냥 “타 지역의 말”이라는 뜻의 “방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신앙선배들 역시 성경의 이 방언을 단순한 외국어라고 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방언이 모두 “외국어”라는 증거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성경에 방언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두 군데 나옵니다(물론 성경신학적으로는 방언과 관련된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처음 방언이 등장하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며, 두 번째가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말할 것도 없이 외국어입니다. 성령강림으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행2:8-9)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당연히 외국어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들은 것은 각각 자기가 살고 있던 곳의 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외국 사람들 곧, 중국사람, 영국사람, 일본사람, 터키사람, 필리핀사람,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을 통해, 각각 자기가 살던 지역 말, 그러니까 중국말, 영어, 일본어, 필리핀 말 등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말할 것도 없이 외국어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 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르냐?”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단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다른 것이었다면 왜 바울이 그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주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성경시대를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방언 사건이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우리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방언은 그 때 사도행전의 방언이 아니고 또 다른 종류의 방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이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른 종류의 방언이다”라는 언급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요?
일단 단어 자체는 사도행전의 “방언”이라는 말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라는 말이 같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 방언들이 나타나는 양상도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이 방언을 다루는 방식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같은 것을 다룹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다른 방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객관적으로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서 출발해서 보면, 객관적으로 이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절대로 사도행전의 방언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것이라면 “방언”이라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자꾸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주변에서 보는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이것을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말씀에서 기초한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말씀에다 끼워 맞추려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성경적으로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르다는 근거를 전혀 말할 수가 없습니다.
2. 고린도전서 방언을 설명하기 위한 구약의 인용부 역시 “외국어”를 지칭한다.
두번째로 논증할 수 있는 점은 고린도전서 14장 21절의 “방언에 대한 구약성경의 인용부”를 통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본문에는 21절과 22절에서 이 방언이 “구약성경의 성취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의 설명은 접어두기로 하고(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비유에 관하여 다룬 61번의 마지막 부분을 참조하십시오), 21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율법에 기록된 바”의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21절에 나오는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가 인용하고 있는 원 구약성경 본문에서는 이 “다른 방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본문은 이사야 28장의 인용입니다. 28장 11절에 보면 이 본문의 정확한 인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사28:11)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이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 있는 방언이 바로 이 이사야 28장의 말씀이 이루어져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사야 28장에서 이 “방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사야에서 “방언”이란 외국어입니까? 알아들을 수 없은 신비한 천상의 언어입니까?
이사야 28장 말씀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받게 될 화에 관한 것입니다.
1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7절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치며....”
8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11절의 말씀은 이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엉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질 화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교만하였고, 포도주와 독주로 옆걸음을 치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업신여겼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을 들어 그들을 향해 부으십니다. 이 내용이 11절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적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서에 이에 관한 내용은 많이 나옵니다. 적국의 침입 말입니다. 즉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듣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자신들을 친 이방 민족들의 말, 즉 외국어입니다. 고린도전서가 인용하고 있는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하는 이사야의 말씀에서 다른 방언이란, 명시적으로 “외국어”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에서 지금 성취된 방언 현상을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외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한 예언의 성취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3. 교회 역사상 우리의 선배들은 이것을 외국어로 이해했다.
세 번째는 과거 교회 역사를 통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세 번째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교회 역사 속에서 방언이 외국어였는가, 아닌가?”
먼저 칼빈이 이 부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봅시다. 칼빈은 고린도전서의 이 방언에 관한 부분을 설명하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을까요? 이 방언을 천상의 언어로 이해할까요, 아니면 외국어로 이해할까요?
저는 사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칼빈주석을 살펴보고는 잠깐 놀랐습니다. 놀란 이유는 칼빈이 이 방언에 관하여 “외국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말인지”에 대해 아예 논의 자체를 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아예 설명할 필요도 없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을 외국어라고 전제하고 내용을 시작합니다. 칼빈의 고린도전서 14장 주석은 모든 내용이 이 방언이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의 유익과 주의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방언이 외국어 외의 다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 양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러한 내용은 초대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되는 어거스틴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변종길 교수가 쓴 『성령과 구속사』라는 책에 보면, 어거스틴이 방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칼빈도 그렇지만, 어거스틴 역시 ‘방언’을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지 이상한 말로 이해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방언’을 “모든 민족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방언이라는 것 자체를 그가 여러 민족들에 의해 실제로 말해진 자연적인 인간 언어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변종길. 『성령과 구속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p67)
변 교수는 이 말에 덧붙여 “방언으로 말하는 현상이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명하다”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역사 안에서 칼빈이든 어거스틴이든, 우리가 잘 아는 대다수의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방언을 외국어로 이해했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천상의 말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20세기, 21세기의 한국에서 살고 있어서 방언이 친숙한지 몰라도 17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교회들에 방언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것, 그리고 당연히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것은 이교도들에게서는 볼 수 있었는지 몰라도, 개신교회 안에서 이런 현상은 전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사의 뿌리를 더 더듬어 올라가 보아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교회사적 위인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방언을 발견하니까, 은연중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방언이 많았겠지...”
하지만, 초대교회의 모든 사료들 중 사도들의 시대와 사도들을 이은 속사도들의 시대....조금 더 나아가 교부들과 감독들이 형성되는 3세기까지의 모든 사료들을 다 검토해 보아도, “방언을 한 사람”의 기록은 단 두건밖에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두 건은 “몬타누스”와 “터툴리안”입니다. 고대 사료에는 이 두 사람이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몬타누스는 정통 기독교인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신비주의”로 인해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인물입니다. “터툴리안”도 그렇습니다. 터툴리안은 원래 교부였고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인물이지만, 후기에 몬타누스의 영향을 받아 정통교회에서 떠나 역시 신비주의에 귀의한 인물입니다. 즉, 초대교회 300년 역사에서 실제로 “방언을 했다”고 기록된 건은 이 신비주의와 관련된 두 인물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초대교회 역사에서 방언을 했다는 사람들은 “기독교회”와 관련되어 있기 보다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방언이 제대로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입니다. 그것도 특히 20세기에 신오순절 운동(또는 빈야드 운동)이 일어나면서 오순절 운동과 관련된 교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한국에서는 순복음이 대표적입니다). 그나마 오순절 측의 주장을 살펴보면, 오순절 교회들도 처음에는 방언에 두 종류의 방언, 즉 자기들이 하는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과 외국어로서의 방언,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선교사들은 선교를 갈 때 그 지역 언어를 익히지도 않고 갔다고 합니다. 거기 가면 외국어 방언을 받을 거라고 믿은 거죠. 그런데 실제 시간이 흐르면서 선교사들이 외국어 방언을 받는 일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 교단은 오늘날 외국어 방언은 없는 것이라고 거의 결론을 내린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결국 성경의 방언은 오순절 교단에서 현재 없다고 결론내린 상태이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종류의 말로서의 방언만 현재 교회들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이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방언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 세 가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모든 방언은 외국어다” 라고 결론 내려도 될 것입니다. 방언이 외국어라는 사실은 성경주해를 통해서도, 역사를 살펴볼 때에도 그러합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외국어이고 뭐고를 떠나서, 방언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방언은 교회 역사에 이단으로 정죄 받은 신비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예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2천년 동안이나 교회에 한 번도 주시지 않았던 방언을 지금 이 세기에 폭포수처럼 쏟아 붓고 계신 것일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글쎄요?” 입니다.
- 윤석준 목사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www.lovereforme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