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철학의 이 한 마디 31 - 정약용
한국철학의 이 한 마디 31 - 정약용
ㅡ 김경윤
본성은 갖추어진 것이 아니다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 棉布新治雪樣鮮
이방 줄 돈이라고 황두가 뺏어가네. 黃頭來博吏房錢
누전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 漏田督稅如星火
삼월 중순 세곡선(稅穀船)이 서울로 떠난다고. 三月中旬道發船
정약용이 탐진(지금의 강진)으로 유배 가서 그곳 실정을 개탄하며 지은 한시 「탐진촌요(耽津村謠)」중 일부입니다.
지기가 ‘탐진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가? 그곳은 참으로 험한 곳이라고 하던데’라고 묻자 정약용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북방 사람이 나를 위해 슬퍼하며 걱정하여 말하기를.
‘호남의 풍속이 교활하고 각박한데 탐진이 더욱 극심하다네. 그대는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허! 말을 어찌 그리 잘못하는가. 탐진 백성들은, 벼 베기가 끝나면 농토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곧바로 그 이웃 사람의 논을 경작하기를 마치 자기 논밭처럼 하여 보리를 심는다. 내 말이 ‘잘하는 일이다. 보리가 익으면 반으로 나누느냐?’고 하니 아니라고 한다. ‘세금을 낼 때 그 반을 부담하느냐?’고 하니,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경작자가 다 가질 뿐 밭주인과 나누지도, 또한 세금도 내지 않는다. ‘그러면 품앗이로 보답하느냐?’고 물으니 그것도 아니라 한다. (……) 아아 참으로 어질고 후덕한 풍속이다.
관가에서 고을 수령이 향교 유생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문서를 발부하여 세전을 받아들일 때에는 각 집마다 12전을 물려도 들어주고 25전을 물려도 들어준다. 그리고 오늘 징수하고 내일 또 징수하여도 들어주어 그대로 내라는 대로 들어주며 그 사용처를 묻지 않는다. 또 종에게 사사로이 증여할 경우 땅을 살 만한 큰 재산을 실어가도 묻지 않으며 그 돈으로 기생을 끼고 뱃놀이를 하는 비용에 충당해 없어버려도 묻지 않는다. 이래도 오히려 교활하고 자박하다 하겠는가. 공평한 논리로 살피고 공경한 말로 평가한다면 누가 어질게 되고 그 누가 도적이 되겠는가.“
어진 백성과 도적 같은 관료.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공평한 논리로 살피고 공경한 말로 평가한 호남지역 주민 평가입니다. 사실 좁은 땅을 갈가리 나누어 지역정서를 조작하고 지역간의 갈등을 조장하며,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소수 지배세력일 뿐, 지역을 살아가는 민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기의 잘못된 지역 정서를 논박하고, 그 지역 민중의 어질고 후덕한 마음과 비참한 생활상을 잘 드러낸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양수리의 마재[馬峴]에서 이 마을 목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는 위로 세 형들과, 권철신(權哲身), 이가환(李家煥) 등에게서 학문을 배웁니다. 그의 형들은 서학에 능통했고, 권철신과 이가환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들로 당대 유명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서학과 실학을 배웠다는 것은 당대의 그의 운명이 평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1789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습니다. 학문에 능할 뿐 아니라 과학적 지식도 뛰어나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 때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놓았고,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수원성 건축에서는 기중기 등 다양한 건축기구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그의 형들은 천주교를 믿었다고 하여 모진 시련을 당하고, 그 역시 그로 인해 지방의 외직과 한직으로 내몰립니다. 하지만 목민관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함으로 맡은 고을마다 그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의 집안의 마지막 시련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곧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셋째 형 약종(若鐘)은 옥사하고,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기나긴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18년간의 귀양살이. 그 귀양살이 속에서 탄생한 보석 같은 저술이 바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였습니다. 그는 요직에 있든, 한직에 있든, 귀양을 가든 나라와 백성을 향한 마음은 늘 한결 같았습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이 정약용의 육신을 변방에 묶어두었지만, 그 좁은 땅에서 정약용이 이룩한 세계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많은 정치서적과 실용서적을 썼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그가 전력을 쏟은 것은 조선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관통하는 성리학과의 대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리학이 무엇입니까? 송대의 주자(朱子, 이름은 朱憙)가 집대성한 학문체계이자, 조선조를 관통하는 사유-실천체계가 아니겠습니까. 동양의 예수가 공자라면, 주자는 동양의 바울쯤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에서 출발했던 유학전통의 명맥이 위태로울 즈음, 유교적 사상체계에 노장사상과 불교철학을 녹여 새로운 유학(Neo-Confucianism)을 주창했던 주자는 원시 기독교 사상을 로마화하여 국제적인 종교로 정립했던 바울과 오버랩 됩니다. 성리학이 조선조의 국학이 된 것이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 역시 주자나 바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주자 성리학의 핵심은, 유명한 표준구로 말하자면, ‘성즉리(性卽理)’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세계의 근본원리와 일치한다”는 이 주자의 선언은 이후 수없이 많은 논쟁의 가지를 만들며 증식되어 나갑니다. 일찍이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놀라운 언사를 했는데, 유비하자면 조선 성리학의 모든 논쟁은 바로 이 주자의 ‘성(性)=리(理)’를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문제, 이(理)와 기(氣)의 위계의 문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관계 문제, 사단(四端:仁義禮智)와 칠정(七情:喜怒哀樂愛惡欲)의 관계 등을 놓고 이이나 이황 등 조선조의 대석학들이 벌인 논쟁은 모두 주자가 둘러놓은 울타리의 안쪽에서 벌어진 사건인 것입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주자학은 조선사회를 유지시키는 방패막이 되기도 했지만, 그 지배질서를 벗어나고픈 백성에게는 감옥과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선말 하층민들이 이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역사적 사건이 동학혁명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지식인은? 지식인이 이 ‘철옹성(Iron Cage)'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학문 체계에 대한 변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발견하여 이론과 이론 사이의 충돌을 야기시키는 것, 즉 내파(內波)의 방법이 있습니다. 현대철학자 데리다가 사용하는 해체(解體)의 방법론이 바로 그 예입니다. 데리다는 주어진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그 텍스트 속에서의 모순과 긴장감을 찾아내고, 결국은 텍스트의 핵심을 해체시켜버립니다. 자가당착(自家撞着) 시키기!
다른 하나는 그 이론이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을 발견하여 외부로부터 그 이론의 구멍을 뚫고 확대하는 것, 즉 외파(外破)의 방법이 있습니다. 현대철학자 푸코나 들뢰즈・가타리 등이 사용하는 ‘외부적 사유’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는 근대적 사유가 소외시킨 타자(他者)의 영역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여 근대의 돌파구를 추적했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권력이 욕망의 흐름을 재영토화시키려는 시도를 분석하여 탈주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이름하여 ‘유목민적 사고’를 제창합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시키기!
조선조 성리학 체계를 무너뜨리는 방법 중, 전자를 택한 것이 정약용이었고, 후자를 택한 것이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1803-77)였습니다.
정약용은 주자학적 주제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주자학의 원류인 공맹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학(經學)의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정공법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는 주자가 인용한 공맹의 원전을 다시 분석하고 그 원의(原義)를 되살림으로써 주자의 구도를 해체합니다. 처음 인용구는 정약용이 ?맹자(孟子)?를 정리한 ?맹자요의(孟子要義)?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저는 이 한 문장만으로도 정약용의 거대한 면모를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성리학의 체계를 완전히 뒤엎는 반역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주자의 ‘성즉리(性卽理)’가 운명의 언어, 신분의 언어, 위계의 언어라면, 다산의 ‘성자비리(性者非理)’, 즉 ‘본성은 갖추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실존의 언어, 자유의 언어, 평등의 언어입니다. 전자가 닫혀있는 체계라면 후자는 열려있는 체계입니다. 전자가 이미 완성된 구조물이라면 후자는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미완의 방향성인 것입니다.
저는 다산(茶山)에게서 근대를 준비하는 한 선구자의 모습을 봅니다. 중세 언어체계 속에서 솟아오르는 근대 사상의 씨알을. 그리고 ‘본성은 갖추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이 한마디 속에 수십 년 고난의 세월 속에서 수천 권의 책을 읽으며 수백 권의 책을 쓴 다산의 무게가 실려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