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전문>- 2003.신동아11월호 : 박정학 치우학회장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트로이전쟁 못지않은 탁록대전
치우 시기에 이르러 동이연맹(고을사회로 볼 때)을 다스리던 염제(왕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염제가 있음)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연맹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일어났다. 그러나 어리석은 염제 유망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한다(이에 앞서 염제는 황제와의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황염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족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였다.
같은 동이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여성들에게 쫓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 패하곤 했다.
여기서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 ‘여성들이 황제를 좋아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모권사회였으므로 각 부락의 실질 지도자가 여성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치우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인 금속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안개를 일으키고 비와 바람을 부르는 등의 도술을 행했다고 하니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자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진다.
이 대전은 기마족이 내려와 농경족과 섞인 동이족 가운데서,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기마족 문화의 치우와 모계사회 지향의 농경문화의 황제 간의 충돌이었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는 동쪽의 정신문화와 서쪽의 물질문화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무덤이 산동반도 서남쪽에 있으며 군신으로 추앙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탁록에서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동·서 문명의 특성이 구분되어 뚜렷하게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두 문화집단(모권·물질 대 부권·정신)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순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치우에 집착하는 중국
이렇듯 의미가 깊은 치우천왕의 역사지만, 그의 활동영역이 대부분 현재의 중국 땅인 데다 국내 문헌사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 학계는 치우 연구를 소홀히했고, 아예 중국 고대의 신화인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중국측은 몇 년 전부터 “치우는 묘족의 선조일 뿐 아니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의 3대 인문시조(人文始祖)”라고 주장하고 치우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적 존재로 보았고, 하우(夏禹)부터 실존 역사로 취급했다. 황제의 자손인 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면서 스스로를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 외에 염제의 후손인 동이족과치우의 후손인 묘만족은 오랑캐라며 야만족 취급을 했다.
1997년 4월 호남성 이안링(炎陵縣)현에 있는 염제 신농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높은 산 위에 ‘염황지자손(炎黃之子孫)’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황제의 자손(子孫)일 뿐 아니라 염제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유적유물의 발굴작업이 진행될수록 황하문명을 비롯해 선진(先秦) 문명의 주인공이
그동안 오랑캐라 비하하던 동이족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자를 비롯해 우수하다고 알려진 많은 중국문화가 한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연구도 속속 나옴에 따라 황제의 자손인 것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치우 연구자들은 세 차례에 걸쳐 치우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동이족의 시조 염제(炎帝 神農)를 자기들의 시조에 포함시키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의 ‘동화정책’에 따라 한 민족이 두 조상을 갖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필자는 ‘한배달’ 치우학회 회원들과 함께 동이족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산동반도와 탁록지역을 찾았다.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에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에 세운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삼조당(三祖堂)’에 염제·황제·치우제 세 사람의 좌상을 안치하고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치우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치우를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야만족으로 취급하고, 염제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 치우의 정벌이라 자랑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치우를 황제·염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스스로 ‘염·황·치(炎·黃·蚩)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셋이 된 이상 황제의 자손이라는 화하족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화하족(황제의 후손)과 동이족(염제의 후손) 및 묘족(치우의 후손)을 합쳐 ‘중화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이로써 중국은 동이의 역사, 묘족의 역사를 모두 ‘중화족’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염·황·치’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93년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이어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가 열리고, 1995년에 귀근원을 만들면서 삼조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후속 연구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치우 끌어안기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2001년 산동반도의 치우무덤을 찾았을 때 주민들 대부분이 그 위치조차 알지 못했으나, 2002년 봄 명지대학 진태하 교수 일행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산동성의 치우 무덤을 복원 중이었다.
또 호남성에 치우의 동상을 세우고 1993년부터 ‘간추절(켋秋節)’ 행사를 개시하여 묘족의 독특한 문화전통을 살리면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계 치우학술대회를 열어 치우에 대한 연구범위를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 이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북유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학자 왕대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1980년대까지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에 대항했다 해서 미워하던 치우를 공동조상으로 받들면서 세계적인 공인을 얻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