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8:10~11)
어느 한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사람들의 온 갖 멸시를 받으며 끌려나왔습니다.
그 여인은 쥐어 뜯기고, 상처입고, 머리가 엉클어지고, 엉망이 된 채 예수님 앞에 끌려나왔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여인을 예수 앞에 데리고 와서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이 여인은 돌로 때려 죽여야 마땅한데 어찌 생각하시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예수님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다 쳐다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자 돌로 이 여인을 죽일려고 한 사람들이 손에 있는
돌을 하나 둘 씩 떨어뜨리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주변을 돌아보라.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 여인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1)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인류에게 있어서 타고난 의인은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일지라도 죄인의 혈육으로 태어났으므로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벗으려고 해도 벗을 수 없는 처참한 저주입니다.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살아 남을 길이 없습니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고 율법 아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를 지었음으로 육신의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지금 현재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한번 십계명을 읽고 하루에 십계명에 어긋나는 일을 얼마나
하는지 체크해보세요. 한 두개 씩 꼭 나와요. 우리도 율법의 구속 아래 자유롭지 못해요.
죄를 어느 고행과 번뇌로 씻을 수 없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2) 율법의 완성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즉사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심판하고 죽이기 않고 그들에게 한 것이 가죽을 옷을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가죽 옷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동물에서 나오는데 가죽 옷을 만들려면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희생물을 만든 것을 의미하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죄인 죽음인데 죽음을 이긴 것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때문에 육신에 걸려있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킨 바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서 7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날 이 시대에 예수를 영접하고 모시고 사는 길이 율법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로 건너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 값을 아무리 오랜 고행과 수행으로도 씻을 수 없고 갚을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그 대속하심으로 우리가 완벽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3) 사랑과 용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9절에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 옷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용서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아담과 하와를 즉시 죽이시기
아니하고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날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돌로 죽이려할 지라도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모든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우리라면 당연히 용서의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종결은 바로 용서에서 납니다. 비록 남이 죄를 지었을지도 그를 용서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국의 샌들백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 "긍정의 힘"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을 고통과 미움의 공간에 가두는 것이라고 했고 용서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게
아니라 서로 마찰도 생기고 갈등도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먼저 용서하면 그것이 분쟁으로 가지 않습니다.
초기부터 용서하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용서에 굉장히 인색합니다.
용서를 잘 못하고 복수해야 분이 풀리는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한참 주의 말씀을 읽고 여러 저서를 읽다보니 제 마음 속에 용서의 필요성이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 용서의 마음을 품고 잘 못한 우리의 이웃을 먼저
용서합시다.
우리가 먼저 남을 율법으로 정죄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남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내 눈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 안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혹시 불의한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에 해당하는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도 남을 먼저 용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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