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느뇨(마2:1-12)-(6)
아기를 찾거든 내게 보고하라
그리스도의 출생지를 알고자 한 헤롯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서 알아냈습니다.
그는 노련하고 간사하며 백성의 평판에 민감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헤롯은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는 대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려고 찾아가는 박사들을 앞세웠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보고하라 나도 가서 경배하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별이 아기께로 박사들을 인도함
그리스도께 경배하려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박사들 앞에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문득 나타나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물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마침내 그 별이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별의 정체를 아는데 천문학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별을 증거하는 자는 그 별의 인도를 받은 박사들입니다.
성경의 기록과 사실의 일치가 성경의 오류 없는 영감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적으로 유일회적으로 일하심으로 구원역사를 획기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진행시키십니다.
구원역사의 새 일은 이전의 빛으로 판단할 수 없고 또한 반복되지 않으므로 다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언약입니다.
성경의 모든 증거는 하나님 나라를 종말에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확증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인 사도로부터 신약성경을 받았으며 성경의 기원을 탐구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박사들은 아기와 그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2장에서 요셉의 활동을 여러 번 언급하면서도 박사들이 아기께 경배하는 장면에서는 요셉을 배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기와 그 어머니’를 한 단어처럼 사용합니다.
경배를 받으신 아기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으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박사들은 아기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세 가지 예물을 예수님의 삼중직에 상응시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애급 피난 경비로 해석하는 것은 문맥과 무관하며 자의적(恣意的)입니다.
박사들은 하나님의 왕권으로 세상을 통치하실 유대인의 왕께 경배하고 그 왕께 합당한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유향과 몰약은 귀한 향품이며 귀한 교역물입니다(창37:25, 43:11; 출20:23-25; 에2:1; 시45:8; 잠7:16,17).
쓸개처럼 쓴 몰약을 포도주에 타서 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했지만(마27:34, 막15:23),
몰약을 장례품으로 사용하는 이유도 몰약이 귀한 향품이기 때문입니다(요19:39-40, 마26:12).
헤롯이 베들레헴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임
주의 사자가 박사들의 꿈에 나타나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 명령했습니다.
그리스도께 경배한 박사들은 헤롯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사의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명령했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다시 명령이 있기까지 거기 있으라’
요셉이 주의 사자의 명령대로 행하여 수년을 애굽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살린 모세의 부모처럼
박사들과 요셉은 아기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헤롯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사의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복음에 참여한 자의 이름과 행함도 함께 증거되고 기억됩니다(마26:13, 히11:23).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난에 대해서 마태는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려하심이라고 해설합니다.
성경 난외에는
호11:1 ‘내 아들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부를수록 우상 앞에 분향하였다’가 인용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출애굽의 사랑을 회상하며 구원의 예언과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인용은 끝 날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새로운 출애급으로 설명하는 이사야의 예언을 축약한 것입니다.
마태는 종말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처음 구원자인 모세를 모델로 해서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고난 받는 자기 백성의 일원으로 출생시키시고,
그를 고난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영광을 주심으로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 백성으로 복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언구절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증거하고 인용합니다.
신학용어로는 종말론적 기독론적 해석과 메시야 성취인용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종말론적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하는 것이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구약성경의 의미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를 경영합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에 비추어
그 이하 나이의 베들레헴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한 조치입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설합니다.
‘라마에서 큰 통곡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렘31:15)’
라마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여기 라마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의 사무엘의 고향입니다(삼상7:17).
유다가 바벨론으로 마지막 포로되어 갈 때에 이곳이 포로집결지이며 예레미야는 이곳에서 석방되었습니다(렘40:1).
라헬의 묘지는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있는데(창35:19) 라마에 있는 것 같습니다(삼상10:2).
라헬은 야곱의 12아들을 낳는 일에 언니 레아와 경쟁했습니다.
늦게 요셉을 출산하기 까지는 언니 보다 더한 그녀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창30:).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포로들이 라마에 집결했을 때에
거기 묘가 있는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헬이 통곡했으나 그들에게 돌이올 소망이 있다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위로 받지 못한 라헬의 통곡만 인용하며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해설합니다.
베들레헴 유아 몰살은 그리스도의 끊어짐이며 이방에 포로된 이스라엘의 구원의 끊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의 히브리 남자아이 살해 명령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를 건지신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유아 몰살에서 그리스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들이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나님의 대권을 주심으로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영원한 구원을 확증하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나사렛 사람이 되심
헤롯에게서 아기의 생명을 지키려고, 주의 사자의 지시대로 요셉이 애굽에서 숨어 살았었습니다.
이제 헤롯은 죽었으나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에 숨어 살았습니다.
이 사건을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려하심이라고 해설합니다.
성경 난외에는 사11:1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가 인용구절입니다.
멸망당한 다윗 왕가의 뿌리에서 나와 결실하는 한 ‘가지’의 히브리어 발음이 ‘나치르’여서 ‘나사렛’과 유사한 점 때문입니다.
발음의 유사성보다는 이사야11장은 메시야 예언 장이며
메시야의 소식을 듣고도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은 메시야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이 고난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에 은거한 것은 죽음의 위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령인 요한이 잡혔을 때에도 나사렛에 은거하셨는데
그리스도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흑암과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에게 비치는 큰 빛이며
나사렛에서 천국을 시작하셨습니다(마4:12-17).
그리스도는 나사렛 이단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디 계시느뇨?
고난 받는 나사렛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아멘!
김강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