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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는 황산벌 전투에서 망한 것이 아니다!”

한주랑 2015. 11. 12. 22:46

"백제는 황산벌 전투에서 망한 것이 아니다!”

저자와의 만남(1)- 사학계의 '파이터' 이희진 박사

글 | 이상흔 조선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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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희진 제공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충주 ‘탄금대 전투’가 실제 벌어진 곳은 탄금대가 아닙니다. ‘황산벌 전투’에서 투입된 백제군 역시도 ‘결사대’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전투현장을 꼼꼼하게 답사해보면, 문헌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의 이희진(李熙眞) 박사는 우리 고대사학계 일부가 식민사관에 젖어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며 ‘돌직구’를 날려온 사학계의 ‘파이터’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책미래)이란 책을 통해 발로 뛰는 현장 역사가의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나타났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역사의 분수령이 된 주요 전쟁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직접 해당 전적지를 일일이 답사해 당시 전투 현장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이 책에서 소개된 주요전쟁은 황산벌과 백강전투(삼국시대), 처인성 전투(고려), 탄금대 전투(조선), 우금치 전투(근대), 춘천-홍천(6ㆍ25) 전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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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진 박사가 최근 펴낸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와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
저자인 이희진 박사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던 현장을 찾아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다”며 “실제 현장을 찾아보면 기록으로만 보던 것과 많이 다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은 그만큼 글로만 이해하는 역사와 현장감을 느끼는 역사가 아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발품이 많이 드는 기획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월간 사람과 산> 편집장을 지낸 김우선 사진작가와 군인출신 군사전문가와 팀을 이루어 우리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준 전쟁의 역사적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현장 답사가 중요한 것은 기록을 통해 단순하게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현장에 가서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느냐를 느끼는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현지답사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이 뒤집힐 때가 있는데, 제가 이번에 책에서 소개한 내용도 주로 그런 것들 위주입니다.”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친 곳은 탄금대가 아니다"
 
이희진 박사는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한 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서강대에서 가야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역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가 전쟁에 대한 관심이었다”며 “따라서 업적의 많은 부분이 전쟁사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이번 저서인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은 물론, <전쟁의 발견> <6ㆍ25 미스터리> 같은 저서와, <백제의 멸망과정에 나타난 군사상황의 재검토><백제-신라 전쟁 양상에 대한 고찰을 통한 백제멸망 원인 재검토> <아막성(阿莫城) 전투에 있어서 왜의 역할을 과장하는 학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 전쟁사 관련 학술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전쟁사 관련 연구외에도 <다시 보는 한국사(공저)>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같은 역사 개설서 집필도 해왔다. 또한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 고대사> <잃어버린 백제의 첫 도읍지를 찾아서> <신라의 대일 저자세 외교의 허구> 등의 저서를 통해 기성 학계가 불편하게 여길 주제에 대한 언급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의 부친은 국사편찬위원장과 한국정신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낸 사학계의 원로 이성무(李成茂)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이다. 
 
-박사님의 이번 책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에서 개인적으로 ‘탄금대 전투’를 재조명 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책에서 탄금대 전투가 실제로는 탄금대에서 벌어지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우리는 그동안 역사서나 교과서에서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적(倭敵)과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배웠습니다. 현지의 안내판과 비문(碑文), 순절비(殉節碑) 등에도 모두 ‘신립 장군의 8천 병력이 배수진을 쳤으며, 최후를 마친 곳’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사람들은 탄금대가 전투 현장이라고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신립 장군의 얼굴에 먹칠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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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이 왜 신립 장군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인지요.
 
“탄금대는 충주에서 수도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만약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진을 쳤다면, 신립 자신은 왜적을 피해 피신한 꼴이 되고, 충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달천나루를 왜적에게 그대로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여기 피해있을 테니 어서 지나가라’며 길을 비켜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립 장군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고, 또한 서울로 가는 길이 뻥 뚫렸는데도 탄금대까지 올라가서 싸웠다면 적장(敵將)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또한 정신이 나간 사람이 됩니다.”
 
-탄금대는 어떤 곳인지요.
 
“현장을 가보면 탄금대는 평지가 아니라, 하나의 산처럼 된 곳입니다. 그곳은 장소가 좁아 8천명의 병력이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그동안 현장을 방문한 많은 역사학자가 이런 지형 지세를 보고도 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곳에 우리 군사 8천명이 진을 치고, 거기에 왜군 2만여 명이 달려들었다면, 탄금대는 그야말로 만원버스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기병(騎兵) 활용이 주특기인 신립 장군이 이런 좁은 곳에 병사들을 배치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립 장군이 진을 치고 왜적을 맞은 곳은 어디입니까.
 
“현재 충주 건국대 캠퍼스 서쪽의 ‘모시래들’ 일대입니다. 신립이 단월역이나, 충주읍성이 아닌 모시래들 일원에 진을 친 이유가 바로 왜적이 달천나루를 건너 죽산을 거치면 곧바로 한양으로 향하는 길이 무방비로 상태로 열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립의 임무는 서울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확실하게 일본군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길목을 지켜야 합니다. 이 사실만 인지해도 신립이 결전을 시도할 지형은 매우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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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진 박사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의 부대가 달천을 등지고 배수진을 친곳은 건국대 캠퍼스 서쪽 모시래들 일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탄금대가 전장이었다면, 남한강을 등지게 됨으로, 달천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는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도=구글맵
 
 
신립 장군이 문경새재를 지키지 않은 이유
 
-많은 사람이 “신립 장군이 험준한 조령(鳥嶺: 문경새재)을 막지 않아서, 패했다”며 “신립을 졸장(拙將)”이라고 인식합니다. 
 
“당시 정치인들이 퇴진의 책임을 일선 지휘관에게 미루기 위해 조령 방어를 무척 강조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령에 우회로가 있다는 건 당시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립이 조령을 방어하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비난받아 온 것이 과연 타당한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립 장군은 왜 조령 방어를 포기한 것일까요.
 
“신립이 전장으로 향하면서 급하게 모집한 병력이 8천명 정도인데, 대부분이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이런 병력을 가지고 조령을 지키며 우회로까지 지킬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우회로가 있는 상황에서 조령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적에게 길을 내어줄 위험부담이 있었다는 의미군요.
 
“바로 그 부분이 핵심입니다. 당시에 문경에서 충주를 지나 서울로 가는 길은 조령 외에 두 군데가 더 있었습니다. 조령 오른쪽에 계립령이 있었고, 충주를 지나지 않고 문경에서 연풍-괴산으로 빠지는 길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립 장군이 8천명의 병력으로 조령을 막았다고 해서 일본군의 북상(北上)을 저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령보다 더 남쪽에 있는 ‘고모산성’(姑母山城: 석현성)의 경우, 우회로가 없는 요새 중의 요새였습니다.”
 
-신립 장군이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고모산성 방어를 왜 포기했습니까.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했던 시점에 이미 왜군(倭軍)은 고모산성을 통과해 문경 조령 아래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석현성의 경우 상주에서 패배하고 도망가던 이일(李鎰) 장군이 지킬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미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이곳에 진(陣)을 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립장군은 석현성 다음으로 우회할 곳이 없는 단월역-달천 지역을 택한 겁니다. 즉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모시래들판에 진을 친 것은 신립이 겁을 먹었거나, 고집이 세거나, 전술이 모자라는 아둔한 장군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10만 나당연합군을 맞아 백제가 취한 전략
 
-박사님은 책에서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로 유명한 ‘황산벌 전투’도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더군요. 흔히 백제는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신라군에 패하면서 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제의 패망과 관련해서는 잘못 알려지거나 승자(勝者)에 의한 의도적인 왜곡이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이 몰려오는데도 백강(금강 하구)과 탄현을 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가장 기본적인 <삼국사기>의 기록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나온 것입니다.”
 
-백제가 백강과 탄현을 모두 수비했다는 뜻인가요.
 
“먼저 백강 전투부분부터 말씀드리면, 나당연합군이 백강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병력을 배치해 두고 기다렸다는 것이 기록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백강에서 실제 전투도 벌어졌습니다. 탄현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는 마치 신라군이 탄현 이외에는 백제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처럼 묘사해놓았습니다만, 한강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신라로서는 얼마든지 미리 이쪽으로 이동시킨 병력이 남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제가 탄현만 막고 있다가 신라군이 북쪽으로 우회해서 남하하는 날이면 더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탄현에서 막고 있지는 못한 겁니다. 이 점은 신립이 조령만 막고 있을 수 없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백강을 지켰다면 어째서 나당연합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나요.
 
“일단 병력 차이가 크게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소정방은 일부 병력으로 백제군을 금강 하구인 장항지역에 붙들어 놓고, 일부 병력을 반대편 기슭인 군산 지역으로 이동시켜 상륙시켜도 양쪽 모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질 만큼 많은 병력을 보유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백제 측은 양쪽 기슭 모두를 방어할 병력이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백제 측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점은 상륙 중에 뻘이나 모래밭에서 제대로 올라오지 못하고 고전하는 것인데, 기록에 보면 당군은 신라군이 준비한 버들로 엮은 돗자리를 깔고 개펄 지대를 통과했습니다. 백제군은 개펄이 방어벽이 되어 줄 것을 알았는데 돗자리를 깔면서 돌파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반대편 기슭에 병력을 투입해 당나라 군대가 산 위에 진을 친 후에야 반격에 나섰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어찌 되었든 절대적인 열세(劣勢)의 병력으로 백제군이 10만 당군을 맞아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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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벌 전투도.

-‘황산벌 전투’도 백제 패망의 결정타가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백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망할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지리멸렬했으면 나중에 부흥운동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죠. 수도를 점령하고 왕족들을 잡아간 다음에도 백제부흥운동으로 당나라 군대는 사비성에서 고립되어 당나라 조정이 철수를 고려할 정도로 부흥군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게 된 내분은 의자왕이 집권하고 있던 때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운동 중에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는데, 그동안 이를 너무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백제가 망한 후 모든 기록이 백제나 의자왕에게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승자의 기록만 보고 역사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백제군은 나당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백강과 황산벌 두 군데에서 방어선을 친 것이네요.
 
“계백이 황산벌에서 전사(戰死)하자, 이곳에 투입되었던 백제군을 백강 전투에 투입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산벌에서 전투가 백제 패망의 치명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제군이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은 수륙(水陸) 양면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백제는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분산배치해서 적을 막아야 했습니다. 이런 불리한 점을 타개하기 위해 백제군이 선택한 전략은 기동성을 살려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황산벌 전투에서 밀리자, 투입된 병력을 곧바로 백강 전투에 합류시켰던 겁니다.”
 
백제 패망의 결정타는?
 
-그러면 왜 그동안은 백강과 탄현을 막지 않은 것처럼 인식해왔을까요.
 
“<삼국사기>에는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지났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나당연합군이 무저항으로 통과한 것처럼 보이도록 한 승자의 기록입니다. 즉 백제라는 나라는 망조가 들어 당연히 막아야 할 곳도 막지 못했던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황산벌에서 백강까지 짧은 시간에 병력 이동이 가능한지요.
 
“그 점이 의문이었으나, 제가 현지답사를 해보니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가까운 포구까지 이동 후 대기해놓았던 배를 타고 백강으로 갔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 포구가 바로 강경의 황산 포구입니다. 강경 황산 포구는 근대까지만 해도 매우 중요한 포구였습니다. 황산벌의 후보지 중의 하나인 논산에서 강경까지 10km 정도, 연산에서도 18km 거리인데, 2~4 시간이면 이동이 가능한 거리입니다.”
 
-황산벌의 정확한 위치를 두고 학계의 논란이 많습니다.
 
“그래도 논산, 연산 등으로 좁혀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충남 지역의 일부 연구자들이 황산벌 전투가 황산성 같은 산악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이 안 됩니다. 현지를 답사해보면 알겠지만, 그곳은 신라군의 사비 진격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신라군이 이 먼 곳까지 쫓아와서 백제군과 싸워줄 이유가 없습니다.
 
탄현이 백제 방어에서 천혜의 요새였다고 하니, 거꾸로 말하면 신라군 입장에서는 결코 지나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을 겁니다. 저는 신라군이 지형적인 난점이 적은 북쪽의 우회로를 통해서 공주를 거쳐 황산벌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황산벌은 기존의 학계에서 주장하는 연산이 아니라 논산일 가능성이 큽니다.”
 
-계백은 왜 전투를 넓은 들판에서 벌였을까요.
 
“먼저 우회하지 못할 방어거점이 없는 한, 백제군이 이동하는 신라군을 추격하여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이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신라군의 위치를 파악하다가 사비 근처까지 접근한 다음에야 앞을 막고 방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또 황산벌이 그렇게 불리한 지형이 아니란 겁니다. 백제군 사비로 들어오는 길 중에서 산줄기 사이에 나 있는 길을 골라서 방어한 겁니다.
 
기록에도 당시 백제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라군도 세 길로 나뉘어 싸웠다고 했습니다. 계백은 황산벌에 와서도 샛길이 있기 때문에 신라군이 선택할 수 있는 길 세 곳을 모두 차단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급해진 신라는 어린 화랑을 앞세워 백제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여기 밀린 백제군은 남은 병력을 재빨리 백강 수비를 위해 철수시켰던 것입니다. 즉 백제군은 결사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결사적이었던 것은 신라 쪽이었습니다.”
 
-백강과 황산벌 전투가 백제 멸망의 결정타가 아니었다면, 백제는 어떻게 패망했는지요.
 
“이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실제 결정타는 사비성 내부에서 황당한 원인으로 발생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접근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으로 피신하며 사비성 방어를 둘째 아들 태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태는 의자왕이 피신한 다음 자기가 왕으로 즉위해버렸습니다. 졸지에 찬탈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자 백제 왕족들은 나당연합군이 물러간 다음, 찬탈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기 싫어 성에 밧줄을 걸어놓고 탈출해 나당연합군에 투항했고, 이 때문에 사비성은 제대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함락된 겁니다.”
 
이희빈 박사는 “백제는 백강이든, 황산벌이든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며 “이중삼중의 방어라인을 구축하고, 대비했다”고 말했다.
 
“사비 외곽에서도 전투를 치렀습니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농성하면서 적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전술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 쪽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인 것을 감안한 나름대로 타당성 있는 전략이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결국 왕위를 찬탈한 둘째 왕자 때문에 사비성이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나당연합군의 상륙이나 황산벌 전투 자체보다는 왕자의 왕위 찬탈로 인한 내분이 백제 패망의 결정타였습니다.”
 
"일본 황국사관에 지배당한 우리 고대사학계"
 
-혹시 부친의 영향으로 역사학자가 되었는지요.
 
“오히려 저는 아버지의 영향에 종속되는 것이 싫어, 문과(文科)를 선택하지 않고 이과(理科)를 선택했습니다. 왠지 모를 반발심 같은 것 때문에 이과를 선택했는데, 대학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졸업하는 순간 ‘이것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부 시절은 저에게 일종의 방황의 시절이었는데 그런 경험이 오히려 저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학부 시절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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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희진 제공

-이번 책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에 6ㆍ25 당시의 ‘춘천-홍천 전투’에 대한 현장 답사도 소개되어 있던데, 고대사학자가 현대사까지 다루는 경우는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석사 때까지 현대사를 전공했고, 박사 때 고대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의 주제는 똑같은 전쟁사였습니다. 역사 연구에서 시대를 오가는 것보다 사실은 분야를 오가기 더 어렵습니다. 전쟁사를 제대로 모르는 많은 사학자가 고대전과 현대전의 전략과 전술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현대전의 시각으로 고대의 전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시의 전투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무척 제약이 따릅니다. 저는 2010년 한국전쟁 문제를 다룬 <6ㆍ25 미스테리>라는 책도 펴낸 적이 있습니다.”
 
-작년 초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 고대사학계를 맹렬하게 비판했더군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식민사학’은 일제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역사학입니다. 한마디로 ‘너희 조선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식민지배를 받아야 할 만큼 못난 족속이었으니 현실을 받아들여라’ 하는 메시지를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구겨 넣기 위해 정치적 요구에 맞춰서 역사를 만들어 낸 사관입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우리의 고대사를 집중적으로 조작했는데, 문제는 현재의 우리 학자라는 사람들이 식민사학이 그려놓은 역사 퍼즐에 놀아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식민사관’의 뿌리를 한번 짚어 주시죠.
 
“식민사관의 근원은 <일본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역사책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황국사관’(皇國史觀)입니다. 황국사관은 20세기 초 활약한 일본의 한 역사학자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국가 형태, 즉 만세일계(萬世一係)의 황실을 받들어 온 일본 민족의 역사를 구성하고, 황실의 존엄과 국체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일본 사회가 역사를 쓰는 정신적 기반을 보여주는 것이고, 지금까지도 상당수의 일본 역사학자들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 박사는 “이를 좀 더 좀 더 쉽게 말하면 ‘일본의 역사 서술 목적이 천황지배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이라는 한줄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지배층은 식민사관을 만들어내 내기 훨씬 전부터 자기네 백성을 조종하기 위한 역사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황국사관입니다. 식민지배의 정당성도 이 황국사관의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역사관을 왜 이웃국가인 우리에게 강요했는지요.
 
“당연히 처음에는 자기들 백성을 ‘등쳐먹으려고’ 만든 사관이지만, 근대에 들어 일본이 강성해져 조선을 식민지로 삼게 되면서 주변 민족을 억압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식민사학에서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피지배민족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일제의 학자들은 그 일환으로 ‘한국의 역사 깎아내리기’를 진행했습니다. 일제는 우리 역사의 부정적인 측면만 골라내서 이를 부각시켰는데, 특히 고대사가 이런 작업을 하는데 가장 만만했습니다. 한반도에 나라 꼴을 갖춘 나라가 일본보다 늦다느니, 최소한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 있던 나라들이 일본에 휘둘려 왔다느니 하는 터무니 없는 주장(임나일본부)들이 나오게 된 것이죠.”
 
-지금은 일제시대가 아니고, 역사학자 자신들도 식민사학을 따르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식민지 시절 일본학자는 자기들의 식민지배에 필요하니까 식민사학이라는 것을 만들고 보급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은 당연한 것입니다. 실제로도 식민사학의 추종자로 분류되는 원로학자들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을 규탄하고,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 자신도 스스로 민족주의학자라고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국사학계의 원로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저술한 내용과 역사관, 민족관을 보면 일제가 만들어 놓은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일제의 주장을 그대로 베끼고, 인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들 원로학자가 키워낸 제자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 고대사학계가 장악되다시피 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식민사학이 우리 고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중요한 사례 하나만 들겠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무시합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면 일본의 고대국가 성립보다 우리가 500년 정도 앞서기 때문입니다. 초기 문명에서 국가발전 척도는 얼마나 일찍 고대국가를 세우고, 그에 걸맞은 국가적 파워를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에 직결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국가 체계조차 갖추지 못한 나라가 이미 체계를 갖춘 나라를 침략해서 그들을 지배했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식민사학자들이 짜낸 묘안이 일종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못 믿을 것으로 끌고 들어가자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을 쓰는 것입니다.”
 
이희진 박사는 “식민사학의 문제는 원로들의 연구가 자기 연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을 길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라 자체가 식민사학의 마수(魔手)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의 성립시기와 과정이 식민사학자들의 원하는 틀에서 짜여 있습니다. 당연히 첫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고대사가 계속해서 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온 것입니다. 고대사에서 식민사학의 편견이 집요하게 작용하고 있고, 너무나 조작이 뻔한 일본 고대사 기록에 대해 의심 없이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는 일이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역사가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역사연구란 기록을 그대로 베껴내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식의 역사 연구를 하면 역사학자라는 존재가 필요가 없습니다. 역사학자라는 직업이 있는 것은 ‘기록이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록 뒤에 숨겨진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입니다.
 
우리 고대사학계는 아직도 황국사관에 절어 있는 일본의 연구 성과를 베끼기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식민사학의 영향을 제대로 인식할 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엉뚱한 것을 식민사학이라고 몰아가는 경향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제대로 된 검증이 되어야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안 되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출처 : 학성산의 행복찾기
글쓴이 : 학성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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